12. 향수, 남이 준 물건을 쓰는 즐거움

타인이 선물해 준 하루

by 어찌



누군가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내 시간과 공간에 들여 준 물건.


향기만으로도 새로운 공간으로 변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내가 들인 물건으로는 이런 새로운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 선물 받은 하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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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한창 빠져있었다. 방영 당시 그 드라마는 남편 찾기와 향수를 자극하는 모습,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엄청난 흥행을 했는데, 내겐 이상하게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 역할의 성동일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산삼이 들어있는 산삼주를 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하여, 아무도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장면.

우스꽝스러운 애주가의 모습은 과장되었다 뿐이지, 어딘가 익숙하여 웃음이 나왔다.


먹지도 못하고 금이야 옥이야 바라만 보는 모습, 먼지가 뽀얗게 올라갈 정도로 오랜 시간을 머금은 술통이 방 정리를 하는 지금 문득 떠오른 것은, 그것과 참 닮은 무언가를 내 방 선반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 음, 이건 대학생 때 받은 거니까, 10년은 된 향수네. 푸릇푸릇한 나이였다고 복숭아 사탕 같은 달콤한 향을 받았네. 이제 복숭아가 발효돼서 복숭아주가 됐겠다.

- 이건 10년 산 발효향수보다는 못하지만, 공무원 공부 시작할 즈음 선물로 받은 거니까... 5년쯤 됐나? 묵직한 비누 향이 난다. 비누로 씻어낸 듯이 깨끗하게 시험에서 떨어졌지.

- 아, 이건 취준생 때 받은 4년 숙성된 바디미스트다. 속세를 등지고 싶었나, 사람 사는 곳이 징글징글했나. 비 온 뒤 나무에서 나는 습하고 시원한 향이 난다.

- 첫 취업 선물로 받은 3년 산 향수는 성숙한 꽃 향과 화장품 향이 섞인 내음이, 작년 제주도에 같이 간 친구가 사준 동백꽃 향수는 나름대로 가장 최신 향수다.



내 돈 주고 산 것은 없는데 많기도 하다.

하긴, 썼어야 닳았을 텐데 1년에 향수를 뿌리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줄어들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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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일의 산삼주처럼 극진히 아끼느라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게 향수는 스스로 필요에 의해 들인 물건이 아니라, 타인에게 선물로 받은 것들이었다. 물론 나 역시 좋아하긴 했으나, 당장의 내가 산 물건들도 안 쓰는 판에 누군가에게 받은 물건을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어찌 보면 생필품이 아니라 사치품이었던 셈이고, 내 삶은 사치를 부리기에는 퍽퍽하다 못해 마른안주처럼 쭈글쭈글했다.

물론 향수를 뿌린다는 게 큰 동작이나 힘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칙- 칙- 두어 번 누르는 게 어려울 리가. 그러나 향수를 제대로 사용한다는 건 일종의 '머무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향수를 뿌리는 건 꼭 커피를 마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출근하자마자 대충 다 녹지도 않게 원두를 타서 한 모금에 털어 넣던 커피는, 커피를 마셨다기보다는 퀭한 눈으로 '생명수 마셨어.', '각성제 마셨어.'로 표현되는 것들이었다. 음미라기보다 투약에 가까웠달까?

제대로 '커피를 마신' 기분을 느끼려면 적당한 온도의 물에 원두를 충분히 녹이고, 표면에 얕게 올라오는 크레마와, 뽀얗고 뜨끈한 김을 따라 퍼지는 향을 맡으며 천천히 마셔야 한다.


향수도 마찬가지였다. 바빠서 정신없는 출근길에 1초 만에 뿌리고 뛰쳐나가야 하는 향수라면 제대로 향이고 기분이고 나질 않았다. 천천히 향수 입자가 내 몸에 얹어지는 걸 느꼈다가, 잠깐 숨을 멈추었다가 서서히 퍼지는 향을 들이마셔야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의 시작을 돌보는 포근한 기분. 나를 생각하며 선물을 준 이의 마음을 떠올리고, 오늘의 나를 잘 돌보겠다는 온전한 사치를 누려야 비로소 제대로 향수를 사용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그럴 수 있는 잠깐의 머무름을 즐길 수 있는 하루가 너무 적었다. 일 년 중 손에 꼽았다. 물리적인 시간뿐 아니라 돌보고 돌아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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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한입에 커피를 털어 넣을 필요가 없어졌다.

몇 개월 전부터 다니는 새로운 직장도 출근 시간이 늦어 아침에 커피 향을 즐길 시간은 충분하다. 시간의 여유는 마음의 여유까지 이어졌다.


비누, 숲, 동백꽃 향수를 일렬로 놓았다. 최소한의 양심으로 10년 지난 복숭아 향수와는 이별을 고했다. 뚜껑의 색이 바랜 것도 있었지만, 병 안의 향을 가득 담은 액체는 반짝이며 찰랑거렸다. (아마도) 향도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몇 년이나 눈길 한번 제대로 안 주고 발효주 취급이나 했는데, 여전히 향을 간직하고 있는 게 기특했다. 그러고 보면 힘든 당시 내 온갖 징징거림을 받아주었던, 이 향수를 선물해 줬던 친구들도 모두 곁에 있다.


그 시간 내게 선물을 줬던 이들을 떠올린다. 펜과 노트 등 다른 물건들이 필요에 의해 스스로 사 모았던 것이라면, 향수는 타인에게 선물로 받은 물건이다. 누군가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내 시간과 공간에 들여 준 물건. 나를 돌보는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물건.

향수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



요즘의 나는 천천히 향수를 사용하는 사치를 부리고 있고, 덕분에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지 않았기에, 오히려 새로운 리듬감이 있달까.

5년 산 비누 향은 화장실에 뿌린다. 동백 향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이 마치 모나미 펜처럼 만만하여 가장 자주 몸에 얹고 있다. 편안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방에 물기 먹은 숲 향을 뿌린다.

물리적인 물건을 들이지 않았는데, 향기만으로도 새로운 공간으로 변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내가 들인 물건만으로는 이런 새로운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색무취의 시간에 비누, 동백꽃, 숲의 향이 입혀진다.

선물 받은 하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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