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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Aug 08. 2023

내가 잘 알면서도 하나도 모르는 너에게

마음대로 환상을 기대했다가 추락한 내가 보내는 편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 했던가 (공지영),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두려움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동시에 주는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이라 하였던가(남궁인). 그러나, 난 네게 상처도 두려움을 이길 힘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넌 내게 결국 상처를 주고 또 다른 두려움을 안겨주는구나.


어쩌면 나는 꽤 오래 장기 연애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 계속해서 대상이 바뀌긴 하지만 그 대상에게 내가 얻는 에너지와 위로가 같다는 점에서 나는 학생 시절부터 쭉 너와 연애를 했던 것 같아. 순진했던 시절엔 네가 문자 그대로 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고, 도망갈 낙원이었던 시절도 있었어. 그러나 나이가 먹어가며, 내가 그토록 찬양하고 완벽하다고 느꼈던 너 또한 인간이었음을, 어쩌면 내가 현실에서는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그래서 너에 대한 마음을 계속해서 접으려고 했는데도 잘 접어지지가 않더라. 그래서 난 점차 네게 기대를 줄이면서 너와의 관계를 이어나가게 됐던 거 같아. 그래도 여전히 넌 내게 위로이기도 하고, 나의 열정이기도 했거든.


그런데 넌 나를 끊임없이 배신했어.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배신하더라... 너의 배신 덕분에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단조롭고 좁은 세상인지 알게 되었어. 대신 그만큼 너에 대한 나의 믿음과 기대도 계속해서 깎여 나갔지. 그런데도 난 너를 끊어내지 못하고 계속 작은 기대를 걸더라고. 그런 내가 참 답답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어. 사람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 너와 헤어지지. 혹은 처음부터 너와 만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더라. 근데 나는 너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느껴.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다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너를 만나는 것 같았어.


나는 너를 잘 알면서도 잘 몰라. 누군가 너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나는 30분이고, 한시간이고 너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널 몰라. 그렇기 때문에 네가 나에게 상처를 줄 일은 없을거라고 기대했던 거 같아. 우린 서로 좋을 때만 만나니까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 소비나 서로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실망, 혹은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잖아. 너는 내게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니지. 그러니 나는 너에게 진짜 현실의 것들은 받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현실의 환상적인 요소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너를 끊어내지 못한 것 같아. 그러나 너는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를 환상의 나라에서 현실로 끌어내리더라고. 내가 정말 널 알았다면 네가 나를 그렇게 배신할지도 알았어야겠지. 그러나 나는 네게 배신당할 때마다 생각해. '아, 넌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가 널 잘못 알았구나'


근데 그걸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배신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다'인데 네가 내게 믿음을 주거나 의리를 준적이 있었나? 이건 어쩌면 우리의 연애가 아니라 나의 외사랑, 혹은 나의 지지부진한 짝사랑이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맥락에서 넌 좀 억울하긴 하겠다. 믿음이나 의리를 준적도 없고 내가 널 제대로 안 적도 없는데 배신당했다고 화내고 있으니. 근데 좀 억울하더라도 봐줘. 우리 관계에서 넌 언제나 영원히 갑이고, 내가 평생 을이잖아. 우리 사이에서 넌 언제나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주고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난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기대가 깨지는 사람이잖아.


내가 조금 더 어른스러웠다면 좋았을 텐데. 세상에는 어차피 환상의 나라 같은 건 없다는 걸 아는 어른이여서, 너와 진작에 헤어졌거나 혹은 네게 환상을 기대하지 않는 어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현실에 치이고 돌아와 네게 보이는 환상의 나라에 대한 기대로 위안을 얻는 아직 덜 자란 어른이었기에 억울할지도 모르는 너를 비난하며 다시 한번 구름 위에서 땅으로 추락하게 돼. 한동안 또 땅을 딛고 서 있다가 다시 너에게 기대를 거는 날이 또 올까? 이미 여러번 추락해서 만신창이가 된 마음은 이제 다시 기대를 걸기가 무서워졌어.


미안, 네 행복까진 빌어주진 못하겠다. 그러나 애초에 너의 행복은 내 기도의 유무에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니 미안해 할 필요도 없겠지. 근데 너는 말이야, 많이는 아니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 정도는 꼭 품고 살아가줬으면 해. 네 인생이 불행해질 정도로 큰 미안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네 현실로 인해 내 환상이 깨졌고, 그 환상으로 위안삼으며 지난한 하루를 버티던 내게 상처와 두려움을 안겨줬으므로, 너는 꼭 내게 아주 조금은 미안해 해줬으면 좋겠어. 꼭, 미안해 해줬으면 좋겠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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