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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May 13. 2024

나를 오롯이 책임지는 '맛'

이번 무기력증은 내가 만든 요리로 극복이 될까요?

근래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연초부터 습격한 번아웃과 무기력증에 여전히 허덕이고 있거든요. 무기력증과 우울감이 찾아와도 꾸준히 글을 쓰며 극복하는 사람이고 싶지만, 보통의 인간인 저는 매번 '글을 써야하는데...'하고 생각만 하며 번번이 무기력증에 패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드디어 길고 긴 이번 번아웃과 무기력증의 터널 끝에 와있다는 뜻일까요. 그러길 빕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겨보고자 또 다시 여러가지 도전들을 해댔더랍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들과의 싸움에 이제 이골이 날만도 하지만, 어째 그들은 올 때마다 저번 극복 방법에 면역을 갖추고 오는 것인지 기존에 했던 방법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저는 또 이 세상에 새롭고도 즐거운 일들을 찾아나서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 찾은 일은 '제과 학원 다니기' 였습니다. 별 고민 없는 시작이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읽었던 책의 작가가 마침 우울증을 앓고 있을 당시 제빵 학원을 다니는 것이 본인의 최근 근황 중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이라고 쓴 글을 읽었습니다. 내 손으로 만지고,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내 눈에 결과물이 보인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 나도 제빵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평소 다니던 건물의 다른 층에서 눈에 띄었던 제과제빵 학원에 별 생각 없이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디저트류의 빵보다는 치아바타나 식빵과 같은 담백한 빵을 좋아했기에 제빵을 하고 싶었으나 제과 반은 토요일 오전 9시반, 제빵 반은 토요일 오후 2시 수업인 탓에 일단 제과반에 등록을 했죠. 토요일 오후 수업을 10주 간 듣게 되면, 토요일 오전을 어영부영 보내고 거의 하루를 버릴 것이 뻔해보였거든요. 그리고 그 10주간의 수업을 이번주에 모두 마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과 기능사 수업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제 손을 많이 쓰지도 않았고, 나타난 결과물이 별로 위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제 디저트류의 빵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정도로 빵을 안 좋아하게 되었어요. (ㅋㅋㅋㅋ) 일단 후자의 이유는 원래도 빵을 싫어하진 않았으나 빵순이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제게 매주 처리가 불가능 할 정도의 디저트 빵이 10주 내내 생긴다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시험 특성 상 저렇게 처리가 불가능 할 양이 나오다보니 과목 하나를 2-4명이 조를 짜서 만들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결과물에 제 손의 역할이 들어간 경우가 거의 없을 뿐더러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한 조가 되어버려 수업 내내 서로 눈치게임을 하는 듯한 긴장감이 펼쳐집니다. (제가 공정 중에 실수하는 경우, 상대방의 결과물에도 영향을 미칠테니까요.) 그래서 제과 학원을 다닌 것을 후회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기대한 것과 너무 많이 달랐지만 그냥 한번 해보는 거였으니까 후회까진 하지 않는다." 정도로 대답할 수 있겠네요.


과거에도 이렇게 무기력증에 빠진 저에게 엄마가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이 제 증상에 도움이 되었을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무기력증을 심화시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제가 스스로 사는 공간을 치우고 가꾸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앞서 말했던 작가가 제빵 수업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저는 매주 주말마다 한숨을 쉬면서라도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면서, 울면서라도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면서 느끼거든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 바쁘고 지친 나를 위해서 그분들이 그 행위를 대신 해주시는 순간 제가 그나마 저의 자기효능감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작은 순간이 사라지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그 순간을 지키는 것이 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심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에 오히려 오롯이 나를 혼자 책임지는 것이 더 나을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제가 청소나 빨래의 경우는 울면서라도 해내는 편인데 무기력증이 오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스스로 끼니를 때우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부터 계산하면 이제 자취 5년차이며, 엄마를 닮아 요리를 곧잘 하는 저는 자취 초반에는 밑반찬도 만들고, 찌개도 끓였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달음식이나 포장음식을 시켜 몇 끼를 나눠먹거나 냉동 식품을 데워먹는 식습관에 길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습관은 특히 무기력증이 오게 되면 더더욱 악화되기 마련인데, 배는 여느때처럼 고픈데 음식을 할 기운이 없으니 또 배달을 시켜먹고, 그 음식들은 저의 우울감을 더 심화시킬 뿐이고, 그럼 저는 또 그 우울감을 극복하고자 더 자극적인 음식을 시켜먹는 굴레에 빠져버리고 말죠. 올해 초 이런 굴레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음식에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싱겁다', '짜다', '달다' 뿐만 아니라 '맛있다', '맛없다'는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고 씹어서 목에 욱여넣는 행위만 하게 되던 어느 날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겁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2020년에 방영했던 '삼시세끼 어촌편 5'를 정주행 했습니다. 원래도 삼시세끼를 챙겨보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TV 채널을 돌리던 중에 방송을 하고 있으면 시청하는 수준이었는데, 다른 때보다 차승원씨가 요리를 하시는 모습들이 눈에 계속 들어왔습니다. 쉽게 뚝딱뚝딱 만드는 그 과정과 그걸 다 같이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이요. 그리고 한 끼니를 때우고 나서는 다시 그 다음 끼니를 준비하는 그 단조로우면서도 경이로운 일상이... 부러웠습니다. 무언가를 내가 땀 빼면서 힘들게 만들어 말 그대로 '맛'을 느끼면서 먹는 그 과정이 너무 부러웠고, 저도 그 감정을 너무 되찾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다시 요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왕 배우게 된 제과 기술도 종종 써보자 싶어 각종 기구들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작은 다짐 하나를 했습니다. 앞으로는 최대한 내가 먹는 음식 재료의 출처를 모두 아는 음식을 챙겨먹겠다고요. 즉, 재료 손질부터 조리까지 제가 한 음식들을 먹겠다는 말이죠. 디저트나 빵까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저번주에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엄마는 자주 해준 적이 없었던 '비지찌개'를 해먹었고, 오늘은 팀원들에게 선물해 줄 '조리퐁 쿠키'를 만들었습니다. 저번주에 먹은 비지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다음 주에도 한번 더 해먹을 생각이고, 며칠 전부터 계속 먹고 싶었던 닭볶음탕과 돼지 갈비찜에도 조만간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통밀 스콘이나 밀가루 없는 쿠키도 만들어 먹어 볼 예정입니다. 아, 요즘 유행하는 솥밥도 너무 좋아서 조만간 스타우브 솥도 하나 장만하려고 해요. 이렇게 다시 요리를 시작하는걸로 이번 무기력증이 모두 타파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적어도 저번주 만들어 먹은 비지찌개와 오늘 만든 조리퐁 쿠키 덕분인지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극복이 된 것 같으니, 한 번 희망을 걸어봐야죠. 무언가를 내 손을 통해 직접 만드는 경험과 내 눈에 보이는 결과물, 그리고 그 요리의 맛이 하나하나 느껴지는 그 희열을 나도 다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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