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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Jun 16. 2024

나를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나의 불안이

불안이와의 줄다리기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 주의 : 영화 '인사이드 아웃2'의 스토리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나의 인생 영화 반열에 '인사이드 아웃'이 있다. 우리의 일상에 상상력을 가미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토이스토리, 주토피아,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픽사의 상상력을 정말 좋아한다. 이 영화들은 각기 다른 의미로 내게 위로를 주는데 토이스토리와 주토피아는 나를 나른하고 행복하게 한다면, 인사이드 아웃은 몇 번을 봐도 나를 오열하게 하는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빙봉이 떨어지는 순간을 꼽곤 하는데, 내 눈물샘을 가격하는 장면은 그 장면이 아닌 라일리의 친구섬과 가족섬들이 처절하게 부서지는 순간들이었다. 속으로 선망했던 캐릭터나 어떤 가상의 세계에 대한 향수보다는 내가 어제까지 알던 내가 아니었던 순간 느꼈던 당혹감과 서러움이 내게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탓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을 하기 전부터 기대에 들떠 있었고, 보통은 개봉을 하자마자 바로 보는 영화가 잘 없는데 개봉을 하자마자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의 짜임새는 1편에 비해 못 미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인사이드 아웃2에 기대한 그대로가 녹아 있었고, 심지어 2편은 1편보다 나를 더 많이 울렸다. 2편이 나를 더 많이 울게 했던 하나의 이유는 내가 번아웃의 늪에서 허덕이면서도 책임진 일을 완벽하게 하고 싶어 무리하게 일한 한 주의 끝에 심야영화로 혼자 영화를 봤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2편의 주인공이 '불안이'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한참 보던 중에 갑자기 영화에 나오는 감정들이 '유미의 세포들'의 세포들과 겹쳐졌다. 1편에서는 기쁨이, 슬픔이, 화남이, 걱정이, 까칠이 등 유미의 세포들의 감정 세포가 마치 여러개로 분화된 것 같은 구성에 주인공은 기쁨이 한명이었으므로 유미의 세포들을 떠올리지 못했는데, 2편에서 새로 나온 '불안이'는 유미의 세포들에 따로 나오는 불안 세포와 겹쳐졌고, 불안이와 기쁨이가 본부의 대장이 되려고 싸우는 장면은 유미의 세포들의 프라임 세포를 떠올리게 했다. 유미의 세포들이 방영할 때 심리 테스트로 본인의 프라임 세포를 찾아보는 테스트가 있었는데, 그 때 나의 프라임 세포는 이성 세포였고 공감을 먼저 해주기보다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고, 사람들 앞에서 쉬이 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를 제어하는 내 모습에 나는 이성세포가 나의 프라임 세포가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내 프라임 세포는 불안 세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글에서도 종종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다른 사람보다 불안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언제나 '쓸데 없는 걱정 그만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랐고, 여전히 듣는다. 그런 내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에 하나가 불안이가 상상력(이들은 화가같이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는 세포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된다)들을 이용하여 온갖 발생할 수 있는 불행 A안, B안, C안...을 그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쓸데 없는 걱정'이니까. 그러나 불안이는 이걸 그리게 하는 걸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모든 발생할 수 있는 불행마다 어떻게 대비할지를 알아둬야 하니까. 그게, 그가 라일리를 위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라일리를 위해 폭주하던 불안이는 결국 본인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폭풍에 휘말린다. 본인은 불행에 대비하여 행동했을 뿐인데 그 행동은 또 다른 불행을 만들고, 만들고, 만들다가 결국 어떤 감정도 감정 제어판을 손댈 수 없고, 불안이마저도 그를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 장면은 인간 주인공인 라일리의 과호흡으로 풀이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서 기쁨이가 돌아와서 과호흡을 겪는 라일리를 행복한 라일리로 돌려놓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불안이가 짜증난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불안이가, 안쓰러웠다.


나는 내 불안이(혹은 불안 세포)를 오래도록 증오했다. 그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든거라고 원망했다. 내 안에서 너는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너만 없어지면 나는 멋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 때문에 나에게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쩔쩔 매는 사람이 되었으며, 너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그리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이 되었다고 화냈다. 그런 내 앞에 캐릭터로 나타난 불안이는 말했다, "그게 다 나도 (기쁨이처럼) 너를 위해 한 것이었다."고. 일이 라일리에게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자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불안이의 모습을, 본인이 만든 감정의 폭풍 안에 갇혀 기쁨이를 보며 멍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불안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도록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그저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지, 너는 나를 위해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못 알아줘서 미안해.' 라면서.


내가 쉽게 잠이 들지 못하는 이유가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몰랐던 시절을 지나, 전문가를 통해 내 인생이 남들보다 조금 더 힘든 이유가 불안이 높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시절을 지나, 이 불안을 어떻게 통제하고 이겨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시기를 지나, '나는 너의 불안 때문에 너를 긍정적으로 봤다.'는 상사와 동료들의 피드백을 듣는 경험도 거쳐왔다. 오랜 시간 나와 불안이의 이런 지난한 역사 끝에 나는 '불안이가 쉽게 실수하지 않고, 잘못을 먼저 시인하고 사과하는 멋진 나를 만들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게 너무 과해서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나를 탓하게 하고 잠 못들게 하므로, 이 아이가 폭주는 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아이와의 줄다리기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어서 나는 이번주 내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왜 이것밖에 안되는지 윽박 질렀다가, 또 그 윽박과 자괴감에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안도감과 뿌듯함, 그리고 또 다른 번아웃을 얻게 되었다. 인생이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한 때는 이 줄다리기에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리고 지금도 때때로 언젠간 내가 이 모든 걸 초월하여 성장 동력이 필요할 때만 불안을 꺼내어 쓰는 현자가 될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만,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나는 결국 죽는 그 순간까지 불안이와 줄다리기를 하게 될 거란 걸. 그 줄다리기에서 내가 이기는 때가 더 많아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게 끝날 일은 없으리란 걸. 끝이 없는 이 전쟁에서 내가 덜 지칠 수 있는 방법은 불안이가 이기려고 할 때마다 불안이를 꼭 안아주며 '네 맘 다 안다고, 그런데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며 그를 진정시켜서 기쁨이가 더 자주 이기게 하는 것이란 걸. 어떤 지치고 힘들었던 한 주 끝에, 번아웃과 보람감이 복합되어 내게 들이치는 한 주 끝에, 이 영화는 나를 따스히 쓰다듬으며 나를 펑펑 울렸다. 


"그렇지, 너는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그런데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아도 괜찮아. 너는 충분히 멋있고, 좋은 사람이야. 수고 많았어, 항상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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