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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환 May 09. 2024

중성 노작질

    반쯤 담긴 물. 누군가 목이 마른 이가 있다면, 아직 이 물을 마셔본적이 없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내어 주기 위해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울창한 숲 길을 걸었다. 개척하였다. 물이 반정도 차있는 컵과 커다란 마체테를 들고서, 아무도 가본적 없는 길을, 누구도 생각치 못한 길을, 풀을 해치고 진흙을 다지며 길을 내었다. 컵에 담긴 물은 내가 나뭇가지를 쳐낼 때마다, 이름 모를 꽃 줄기를 밀어낼 때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출렁거렸다. 일렁거렸다. 뚜껑. 뚜껑이 필요해.

    내가 나아갈 때마다 물이 담긴 컵에 전달되는 진동, 그리고 그 진동을 따라 흔들리는 액체의 움직임.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물을 내려다 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움직이던 물은 마치 의식이 있는 생물처럼 움직임이 멈춘 나를 눈치채고, 법칙을 되새기며, 거짓말같이 잔잔해졌다. 내가 움직여야 비로소 찰랑이는 물, 찰랑임을 감지하자마자 통제되는 나의 움직임, 움직임이 멈춤에따라 도리어 나를 비웃는 듯 잔잔해지는 물. 이 삼박자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자연스러운 멋이랄까. 그래서 미동없는 물 컵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나의 움직임을 따라 컵에 담긴 물이 찰랑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섭리같은 것이다. 내가 멈출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의 섭리. 내가 있기 전부터, 나와 같은 인간들이 있기도 전부터, 그것을 뭐라 부르던 그것은 우리가 발명한 것이 아니고, 우연이든 뭐든간에 발견해낸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배제하고 관찰수록, 그래서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계속될수록, 그리고 끝내 거스르려할수록 나는 도리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아주 괴이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것들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한 번은 물을 청하는 이에게 물 한 모금을 건넨적이 있었다. 이 물은 아주 깨끗해요. 지구상 누가 마신대도 아주 극찬을 받을만한 물이죠. 에비앙이 나는 로잔의 그것보다, 명수라 칭해지는 일본의 온천수보다 청량하고 아름답죠. 어떤 이는 말했어요, 그런 물을 마셔본 적이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축복받은 것이라고. 그것을 마실대로 마시고, 탐할대로 탐하였지만,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동시에 충동적으로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검소하게 아끼며, 결국 여유롭고 잔잔하게 누군가를 위해 들고다니는 것조차 하늘이 내린 숭고한 은총이라고. 그러니 마셔보세요. 물맛이 아주 좋을 거에요. 당신이 가진 목마름은 사실 이것을 위한 것일 수도, 아니면 그따위 목마름을 축이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어요.

    건네는 손이 조금 떨렸지만, 마셔보라는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지만, 이 물의 효능과 숭고함을 전하기에는 모자라지도, 더하지도 않았다. 비록 한 모금 이었지만 그것은 어떤 만찬보다도 풍족해 보였고 어떤 무용보다도 수려했다.

    이제 보답을 해야겠지요.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요. 나는 당신의 몸을 탐하고 싶어요. 이따위 물쯤이야 얼마든지 양식하고 배출할 수 있는 당신의 몸, 그 중에서도 입과 눈을 원해요. 지금도 보이는 군요. 당신의 입가에, 눈가에 흐르는 깨끗한 성수, 그것을 원해요. 제가 그것을 갖게 해주세요.

    보답을 하신다면서 어째서 나의 것을 도리어 가져 가시는 건가요.

    나눔이니까요. 나눌 것이 있다는 것,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아름답지 않습니까? 제가 그것이 되어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보답이죠.

    나는 싫었다. 물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런데 물 한모금의 호의를 마치 대단한 호감인양 제멋대로 해석하고 호의를 방패삼아 그것을 누리려 드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그가 말할 때마다 사방으로 튀기는, 어딘가 진득하고 더럽지만, 동시에 텅 비어있어 닦을 가치조차 없어보이는 침방울이 싫었다.

그러므로

선언합니다.


    제가 남은 물을 집어 삼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새로운 물을 만들어내는 일도 없을겁니다. 이 물을 나누는 일도 더는 없을겁니다. 하지만 내가 이 물을 마신다면, 새로운 물을 채워 넣는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고 물을 다시 나누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막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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