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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xiom Jan 15. 2024

슬픔은 과거와 영혼이 마찰하며 일으키는 불꽃이다.

나는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이젠 진짜 그만하자.]

첫사랑이 떠난 직후의 시절.
이별로 인한 여파 때문인지 나는 사소한 실수를 자주 저질렀었다.
일처리가 늦거나 중간중간 멍을 때리는 것 따위 말이다.
그것을 보다 못한 선배가 결국 나를 크게 꾸짖었다.

"야! 박인수! 공사구별 못해? 정신 안 차려?"
"... 죄송합니다."
"나한테만 죄송하면 다행이지, 너 그러다 환자들한테 사과할 일 만든다고! 똑바로 해!"
"네..."

이러한 종류의 잔소리가 주기적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날아왔다.
모두 옳은 말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간신히 참고 있던 궁금증이 폭발하며 전 여자친구의 SNS를 열어보았다.
어떤 여행지 같은 곳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여러 장이 업로드되어있었다.
내가 찍어줬었던 사진들과는 다르게 키도 커 보이고 다리도 길게 나온 예쁜 사진이었다.

'누구랑 갔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거 완전 스토킹 아니야? 온라인 스토킹?'

범죄에 해당하는 단어까지 떠오르자 얼른 SNS를 끄고 더하여 어플도 삭제했다.
동시에 우울함, 슬픔, 외로움 따위의 감정이 밀려왔다.
문득 하나의 걱정이 튀어올라 검색사이트를 열었다.

[MDD(주요우울장애) 진단기준]

증상은 얼추 해당되었지만 아직 얼마 안 된 급성이라 MDD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선배에게 들었던 호통이 떠올랐다.

'공사구분해!'

공사를 구분한다라...
사전적으로는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분한다]라는 의미이다.
좀 더 관념적으로 생각한다면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구분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감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건 무엇일까?

분석심리학자 칼 융에 의하면, '감정은 자아와 주어진 내용 사이에서 발생하는 과정이다.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한 수용 혹은 거절의 차원에서 감정은 한정된 가치를 부여한다.'라고 한다.

무슨 소린지 잘은 이해 안 되지만 어쨌든 나와 외부의 것(환경,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인가 보다.
난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 갖다 붙이는 걸 좋아하기에 이번엔 아래와 같이 생각해 봤다.

[감정은 외부의 것과 내 영혼이 마찰하며 일으키는 불꽃이다.]

왜 불꽃이라 생각했냐면,

감정이나 불꽃이나 사실 화학반응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불꽃은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일 뿐이다.

감정이란 것도 결국 뇌신경망이 '배설'한 호르몬이 일으키는 생화학 반응일 뿐이지 머릿속에 기생하는 어떤 존재(혹은 생명체) 같은 게 아니다.

감정이나 불꽃이나 둘 다 실체가 없으며 언젠간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슬픔은 과거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할 때, 불안함은 미래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할 때 나타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장일 것이다.
이 문장을 이용하여 이렇게 정리해도 될 것이다.

[슬픔은 내 영혼이 과거와 마찰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불꽃이다.]

결국 슬픔이란 것은
'내'가 과거에 얽매여 있을 때,
'과거라는 외부의 존재'에게 묶여 발버둥 치고 있을 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자 찌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감정을 나와는 별개의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을 부터, 

나는 정신을 다시 차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일하다 문득 울적해질 때면,


'이 똥 같은 호르몬 녀석들이 내 머릿속에서 불꽃놀이를 하는구나.'

'과거라는 괴물이 또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말았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은 지금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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