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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xiom Sep 27. 2023

40분에 1명

나는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어느 초가을 당직일 새벽.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지긋지긋한 세 단어.


[응급실]


전화기를 받자마자 응급실 2년 차 레지던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인수야, 난데. 니 선배가 전화를 안 받네.”

“아 네··· 무슨 환자예요 형?”

“21세 여자환자인데, Wrist laceration(손목 열상)이야. Volar(손바닥 방향) 쪽에 Transverse(가로)하게 4cm.”

“···설마 자살?”

“응. 이번 달에 좀 많다? 여하튼 별로 안 깊어. Tendon(힘줄) 한두 개 나간 거 같아. 바빠서 무슨 Tendon인지는 확인 못 했어. 와서 봐줄래?”

“···네, 알겠습니다.”


대화를 요약하자면,

자살하고자 손목을 그은 환자가 응급실에 온 것이다.

이번 달만 8번째.

평소보다 잦다.

상처가 깊지 않다면 정형외과적 관점으로는 엄청 급한 환자는 아니기에,

정해진 루틴대로 처치를 한 후 입원시켰다.


그렇게 지나가는 사소한 일인가 싶었는데,

그다음 달엔, 더 많은 11명이 자살 시도로 응급실로 왔다.

그래서 레지던트들 사이에선 자살과 관련된 대화들이 당시에 자주 오갔다.

그중 기억에 오래 남았던 내용은 2년 차 선배가 내게 해준 말이다.


“인수야, 너 우리나라가 자살률 세계 1위인 건 알지?”

“당연하죠.”

“내가 통계 자료보고 대충 계산해 봤거든? 그냥 단순하게 1년 총 자살인구수를 1년 총시간으로 나눠봤단 말이야.”


그런 걸 왜 계산해보는가 싶었지만 일단 호응해 줬다.


“그래서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데요?”

“평균적으로 1시간에 약 1.5명, 더 쉽게 말하면 40분에 1명씩 자살하더라고.”

“······.”

“롤 한판, 드라마 한 편 보는 사이 한 명이 자살로 인해 사망하고 있는 거야.”

“······.”


40분에 1명씩이라.

사망 시간이 제각각이니 실제와는 다르겠지만 당시 저 말을 들었을 땐 충격적이었다.

막연히 많다고만 알고 있다가 구체적인 시간 단위를 들어서일까.

심지어 저건 자살에 ‘성공’한 사망자들만 계산한 것이다.

자살 시도 그리고 자살 욕구를 지닌 사람들 수까지 고려하면···.


“진짜 문제긴 문제다. 그렇지? 안 그래도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던데. 우리 학생 때도 2명 있었잖아. 기억나?”


같은 학교 출신의 또래 의대생 2명이 각각 다른 때에 자살로 사망했었던 적이 있다.

난 그 당시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네······."


그 이후 다시 자살 시도 환자가 줄긴 했지만 절대 사라지진 않았다.

레지던트 내내 자살 시도 환자란 내게 흔한 환자군 중 하나였다.


레지던트가 끝난 군의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병력 결산이라는 소위 말하는 관심 병사(도움, 배려 용사)들에 대해 지휘관과 간부들이 참여하는 회의에 나도 군의관으로서 참여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것은 생각보다 자살을 시도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근무 당시에도 1년에 한두 명은 꼭 부대 내에서 자살 시도를 하여 내가 처치했던 적이 있었고,

근처 부대에서 한 병사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은 적 있었다.


왜 이럴까?

왜 유독 우리나라에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른 국가(일본 제외)에 비해 많을까?


당연하게도 이런 의문에 대해선 이미 많은 원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타인과의 비교, 사회 구조 문제, 가정환경, 개인 차원의 문제점 등등)

그중 내가 추측한 나름의 원인 하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의대생 시절에 정신과 약을 장기간 복용했었던 레지던트 후배가 있었는데,

그의 경험(자살 욕구)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삶을 유지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괴로운데 뭐 하러 살지? 죽으면 차라리 편안하지 않을까?”

“······.”

“죽는 과정이 고통스러울까 봐 무서운 거지. 죽음 자체는 생각해 보면 고통스럽지 않을 거 아니에요? 고통 그 자체도 못 느끼니까. 잠을 영원히 자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요."

“······.”

"왜, 죽음은 곧 영원한 안식이라고들 하잖아요. 저는 안식을 얻고 싶었어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저도 모르게 자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했었어요. 이렇게 저렇게 하면 확실하게 죽겠지? 이런 식으로.”

“······.”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싶더라고요. 그때 진짜 무서웠어요. 이러다 죽겠다. 그래서 그다음 날 바로 병원에 갔죠.”

“다행이네, 용기 내서.”

“···그렇죠. 그 당시엔 그게 쉽지 않았었거든요.”


최근 조던 B. 피터슨의 저서 <의미의 지도>를 읽는 도중 후배를 떠올리게 하는 글귀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인생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 잔인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인식이 악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은 실제로 고통스로우며, 때로는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며 뼛속 깊이 무의미해 보인다. 그렇기에 생이라는 것 자체를 근절해 버리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조던 B. 피터슨 <의미의 지도> 제5 장 중 '악'에 대해 다루는 내용에서 발췌 p.584 -


저자는 같은 챕터에서 니체와 톨스토이의 글을 인용하며,

종교적 가치의 쇠퇴와 이성적, 합리적, 논리적 사고의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허무주의가 퍼졌고 그것에 빠진 사람들은 죽음을 욕망하기 쉽다는 내용을 담았다. (극히 일부의 내용이다.)


좀 더 단순하고 쉽게,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에는 인류가 너무 똑똑해져서, 삶보다 죽음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라는 의미다.

(근거를 생략한 데다가 단순화까지 했으니 오해의 여지가 있는 문장이다. 깊게 파고들진 말자.)


나는 이 내용을 읽고 군의관시절 고민 상담을 해줬던 병사를 떠올렸다.

스무 살 남짓의 어린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고민을 요약하면 다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 제가 내뱉는 말이 그 상황에 옳은 말이었는지 계속 되돌아보면서 점검하는 습관이 있어요. 그리고 제가 내뱉었던 말들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워요···. 그래서 그 후에 타인과의 대화를 할 때 긴장하고···. 어색하고···. 어려워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게 돼요···. 또 그것 자체가 괴로워지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렇게 악순환으로 이어져요.’


난 이 친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 대화에 있어서 ‘정답’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고 당시 생각했고 그것을 중점으로 해결책을 같이 고민했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와 상담한 뒤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는 교육은(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수능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내는 데에 그 초점을 둔다.

수능 시험은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통해 정해진 정답을 골라야만 하는 시험이다.

그래서 난 우리 모두가 시험뿐만 아니라 다른 의문이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통해 정해진 정답을 찾으려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삶의 이유를 찾는 문제에서도 말이다.


책에서 말했듯, 이성적으로 생각할수록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기 쉬운 경향이 있다.

게다가 삶의 이유에는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객관적으로 정해진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이 없는 것에 정답을 찾으려 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까지 곁들이니

당연히 살아갈 이유에 대한 의문은 ‘죽음이 더 낫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확률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추측한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원인 중 하나는

[이성적인 사고로 하나의 객관적 정답을 고르는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이유를 찾는 데에는 부적절하지 않을까란 것이다.

살아갈 의미를 고민할 때만큼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놓아두는 게 낫지 않을까란 것이다.

(그 대신 어떤 사고방식이 더 건강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좀 더 공부가 필요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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