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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xiom Nov 09. 2023

수술을 지지리도 못하는 교수님.

나는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수술방 안에서의 집도의란 항해를 이끄는 선장과 같다.


선장의 능력에 따라 배의 운명이 좌우되듯이,


집도의의 실력에 따라 수술방 안의 분위기, 업무 난이도, 수술 경과 시간 등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집도의의 능력은 수술방 안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보조의, 마취의, 간호사 등)의 업무부담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수술 경과 시간은 레지던트들에게 있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인데,


레지던트들의 퇴근 시간은 수술 경과 시간에 상당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불운한 날에는, 수술이 10분 늦게 끝난 것이 나비 효과를 일으켜 몇 시간씩 퇴근을 늦추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거의 모든 교수님들은 자신의 수술에 있어서 숙련된 분들이기에, 어느 정도 정해진 경과 시간을 항상 유지한다. (Case 난이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평균적으로는 일정하다.)


그러므로 레지던트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은 그 평균 시간을 ‘정상적인 기준’으로 여겨 수술이 언제 끝날 지를 가늠한다.


하지만 주니어 교수님(나이, 경력이 적은 교수님)들 중엔 아직 미숙하신 분들도 있다.


그분들은 같은 수술 종류라 할지언정 숙련된 분들보다는 수술 경과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경과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정확한 치료이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은 그것을 ‘비정상’으로 여기며 그런 상황에서 주니어 교수님에 대한 일부 직원들의 뒷담화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나의 레지던트 시절 이야기를 하자면,


다른 교수님들은 평균적으로 1시간 이내에 끝냈을 수술도 2~3시간이 넘어야 끝낼 수 있던 주니어 교수님이 계셨다.


그 주니어 교수님 덕분에 일이 밀릴 때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었다.


“왜 저렇게 수술을 못할까?”

“손이 왜 저렇게 느리지.”

“다른 교수님들은 엄청 쉽게 하던데….”


왜 이 이야기를 꺼내냐고 묻는다면,


난 그때의 그 뒷담화들을 후회하고 반성하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 1에서 모피어스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을 교육할 때 이런 말을 한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면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밟으며 균형을 잡고 나아간다.]라는 것을 ‘아는’ 것과 직접 ‘탈’ 줄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가 마이클 폴라니는 명시적 지식, 암묵적 지식으로 명명했다.


- 명시적 지식 

 : 암묵적 지식이 형식(언어, 그림 등)을 갖추어 표현된 것.

 예) 자유형 수영을 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를 공부한 것.

      자기 계발서를 읽은 것.


- 암묵적 지식 : 

 : 경험과 학습에 의해 몸에 쌓인 지식.

 예) 실제로 자유형 수영을 할 줄 아는 것.

      자기 계발서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습관화시킨 것.


* 참고로 조던 B. 피터슨의 [의미의 지도]에서는 이를 노 왓 Know-what(명시적 지식), 노하우 Know-how(암묵적 지식)이란 용어로 설명했다.


어쨌든,


아는 것과 직접 할 줄 아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


진부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과거의 나와 주변 사람들을 보면 이를 꽤 간과하고 산다. (이 것조차 예시에 해당되나….)


심지어 명시적 지식조차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보기만 했으면서’ 안다고 착각해놓고 할 줄 아는 것 마냥 언행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것과 할 줄 아는 것조차 차이가 있는데,


옆에서 보는 것과 할 줄 아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크겠는가.


특히 타인의 행위를 평가할 때,


누가 봐도 쉬워 보이는 일이 막상 실제론 어려울 수 있으며, 누가 봐도 어려운 것이 막상 별게 아닐 수 있다.


결국 경험하지 않으면 어떤 행위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평가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쉽게 비난하고 타인의 언행에 훈수를 두는 사람들은 흔하다고 본다.


공인(스포츠 선수나 연예인, 정치인 등)에 대해 비합리적이고 과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나,


식당이나 가게에서 종업원에게 과하게 엄격한 사람들,


그리고 타인의 연애나 진로, 업무 등 전반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어디서 듣거나 공부한 것만으로 훈수 두는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특히 직장에서, 타인이 조금만 버벅거려도 언짢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왜 저렇게 일을 하지?’

‘일 되게 못하네.’

‘대체 뭐 하는 거야?’


정확히 같은 업무를 하는 경우에는 이해가 가지만, 자신이 해보지 않은 다른 업무를 하는 동료에 대해서도 쉽게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차적으로는 타인의 저조함이 자신의 업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만, 


그 근본에는 타인의 업무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수술방에서 이루어지는 그 오만의 타깃은 보통 집도의인 것이고,


나 또한 그런 오만을 범했던 것이다.


몇 년 뒤 내가 같은 수순을 밟으며 깨달은 것들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어떤 한 수술에 대한 교과서 내용을 빠삭하게 외운 들,


아무리 그 수술에 보조의로서 100번 넘게 참가했다고 한들,


아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것.


집도의와 보조의 간에는 어떤 커다란 장벽이 있다는 것.


그 수술을 정말 쉽게 하는 것처럼 보였던 다른 교수님들이 ‘정상’이 아니라 ‘정상을 뛰어넘은’ 실력자분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그때 그 주니어 교수님이 사실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수술에 임했다는 것….


예전에 아는 동생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지식이란 건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에 불과하고, 그 지식에 경험이 더해질 때 지혜로 변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지혜가 있어야 진짜 ‘안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즉, [지식 + 경험 = 지혜]이고 지식을 안다고 아는 게 아니라 지혜가 있어야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명시적 지식, 암묵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암묵적 지식이 없다면 타인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공인에게는 ‘비판’이란 것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적어도 직장에서는 타인의 실수나 무능력에 대해


‘내가 모르는 어떠한 어려움 때문이겠지.’라는 따뜻하고 겸손한 시선을 가짐으로써,


농담이라도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라고 과거의 나를 반성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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