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짐을 싸서 상경한 지 어느덧 한 달. 별다른 연고가 없는 타지 생활에 적응하던 중 서울에 사는 지인에게 문득 연락이 왔다. 시간 괜찮아? 저녁 한 끼 하자. 그 평범한 한마디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버선발 벗고 뛰어가듯 냉큼 수락했다. 설레는 만큼이나 성큼 다가온 약속 날, 오랜만에 보는 언니 생각에 한껏 들떴다. 늦지 않으려고 계획보다 30분이나 일찍 나왔는데… 이런. 버스를 반대로 타버렸다. 도로 한가운데 있는 버스 정류장은 다 같은 방향 아니었나. 서울에서 버스 탈 때 조심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며 지도를 꼼꼼히 확인했는데, 또 실수할 줄이야. 난 바보가 분명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생각에 여유로웠던 마음은 지각생 꼬리가 달리자마자 조급해졌다. 더운 날이 아니었는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 정류장으로 뛰어가 버스를 잡았다. 결국, 난 언니에게 5분 정도 지각할 것 같다는 사과 문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피자집 문을 열었더니, 언니가 보였다. 땡땡해진 정강이와 종아리가 무거웠지만 서둘러 앉았다. 열감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 볼엔 무안함과 미안함도 함께 피어올랐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숨 고른 뒤에야 언니의 얼굴이 시야에 또렷이 들어왔다. 약 2년 만에 직접 본 언니의 얼굴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반가웠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평범한 안부 인사지만, 버거운 질문이었다. 순간 목 끝까지 부끄러움이 치고 올라왔지만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나름 2년 동안 상경을 위해 돈을 모았고, 부모님께 간신히 허락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지만, 지금은 하는 게 없는 백수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매 순간 ‘내 진로도, 방향도 잘 모르겠어. 막막하네. 갈팡질팡하고 있어.’라고 말할 순 없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이 말하기엔 참 대책 없는 답변이었고, 스스로 나잇값 못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있어. 취업 준비 중이야.” 그래서 나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문장을 내 방패막이로 삼았다. 언니는 내가 2년 전에 서울로 올라올 거라고 당차게 말했던 걸 기억한다고 했다. 근데 정말로 올라올 줄은 몰랐다고. 사실 내가 그 말을 실현할 줄은 우리 부모님도 모르셨을 거다. 가족, 친척, 친구들 … 내 주변 모두가 의아해했다. ‘굳이?’ ‘왜?’
아메리칸드림처럼 상경에 대한 꿈을 꾼 청년처럼 보인 것도 같다. 하지만 나에게 상경이라는 단어는 허울이었다. 나는 상경이라 쓰고, 독립이라 읽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것도,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이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독립하고 싶었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살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분명 내 삶이고 내 것인데, 언제부턴가 내 삶이 온전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특정 직업을 은연중에 추천하는 부모님, 항상 같은 얘기만 하는 술자리 속 대화, 제조공장이 대부분인 고향의 취업 시장. 마치 짙은 테두리의 경계선 안에서 내가 빙빙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서 과연 내가 주체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지속적으로 듣는 주변의 말과 조언에 휘둘리는 내가 못 견디게 싫었다. 팔랑귀와 좁디좁은 나의 시야에서 탈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난 주변 환경을 바꾸고, 본가와 고향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든 자취를 시작하면 월세와 생활비는 지출되는 건 똑같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서울로 가겠다.’ 딱 그 마음 하나로 시작된 독립기. 나조차도 무모하다고 생각할지언정,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다짐하며 떠났다. 비록 다른 곳에서 나의 길을 못 찾고 다시 본가로 돌아가더라도, 그것조차 온전한 나의 손으로 택하고 싶었던 욕심도 함께 품으면서.
“이제 진정한 독립이 시작된 거네.”
언니의 따뜻한 눈빛과 끄덕이는 고개는 내 이야기의 윤활제였고, 언니의 은은한 미소는 나에 대한 응원이었다. 서울에 온 지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나는 나의 선택을 때때론 의심했고 불안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응원하고 싶었다. 처음 독립을 결심했을 때의 마음이 퇴색되지 않도록 다정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혼자만 간직하던 속마음을 평소와 달리 깊은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말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순식간에 피자 한 판을 다 먹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그 많던 피자를 다 먹었는지도 몰랐다.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를 비울수록, 내 마음도 함께 가벼워진 걸까. 식당에서 나와 한껏 들이킨 저녁 공기가 평소보다 상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의 안,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도로에서 함께 달리는 다른 버스들을 추적하듯이 응시했다. 그래. 버스를 잘못 타면 어때. 내려서 다른 걸 타면 되지. 그러면 또 색다른 길로 갈 수 있겠지. 어떻게든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