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설레는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다.
스페인 여행을 꽤 오랜 시간을 망설인 이유는 여행이 주는 피로함 때문이었다. 기초체력도 부족한 데다 운동도 싫어하는지라.. 가야 할 이유보다, 가지 못할 이유가 더 많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 안 가면 또다시 언제 간다고 기약할 수가 없다. 그동안 일만 하느라, 여행다운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간 남편을 위해서라도 꼭 가야 했다. 남편의 휴가를 다 끌어모았다. '원님덕에 나팔 분다'라고 아들 보러 간다는 핑계 삼아, 일단, 용기를 내어 항공표를 검색하고 티켓팅을 했다. 그러고 나서 출국을 앞둔 2개월 전부터 남편 퇴근 후 집 근처 광장을 돌며, 전지훈련(?) 비슷한 걸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600m도 안 되는 운동장 다섯 바퀴 돌기도 힘들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진맥진 잠들어 버렸다. 진정한 저질체력자였다. 그러면서 주단위로 서서히 바퀴수를 늘려가며, 한 달 전부터는 13바퀴를 고정하여 돌았다. 약 1만 보 정도를 매일 걸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전체 일정 초안을 짜고, 여행 준비물을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디를 갈까 막연했는데, 책도 찾아보고, 유툽도 찾아보면서, 마지막에는 가우디 건축 투어와 미술관 투어로 축약했다. 정말 일정 짜는 일이 어렵긴 어려웠다. 여권조차 만료된 지 꽤 되어서, 다시 재발급 신청하고, 숙소, 현지 교통편중 기차표, 방문지 입장권, 증명서(복용약 영문처방전등), 환전, 여행자 보험, 해외로밍 신청등 7박 9일 가는데 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예약이 잘 안 될 때는, 다음부터는 절대 자유여행 말고 패키지로 가자고 몇 번씩 마음의 다짐을 해가며 준비를 했다.
그런데, 참 다른 거는 패키지로 갈 때는 아무 걱정, 아무 준비 없이 가다 보니 알고 가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거 같다. 그래서 다녀와도 남는 게 별로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다 보니, 공부를 참 많이 하게 되었다. 구글링 해서 지도도 수십 번 뒤져보고, 역사도 찾아보고, 환율에도 민감해지는 등 걱정나무도 함께 커갔지만, 다녀와서는 꽤 만족스럽고 기억에 새록새록 남는 여행이 되고 말았다.
출국 당일, 스페인은 여기보다 날씨가 온화해서 늦가을 날씨 같다는 정보에, 가벼운 경량 패딩 차림으로, 12월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여행 캐리어와 함께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셀프드롭백으로 수하물 수속도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인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까지는 15시간 15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잠들만하면 밥을 준다. 1만 m가 넘는 상공에서 식사! 음식은 따뜻하게 잘 데워져 나오고, 맛도 괜찮다. 한 끼까지는 괜찮았는데, 간식으로 핫도그도 주고, 두 번째는 다른 메뉴의 식사를 준다.
꼼짝없이 가만히 앉아서 먹으니, 소화가 잘 될 리 없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준비해 주는 정성스러운 손길에 맛있게 먹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잠깐 눈을 붙였을까.. 시간이 멈춘듯한 비행기 안의 고요.. 1만 m 상공, 구름아래로 조그맣게 보이는 바다와 산, 집...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드디어, 15시간 대장정의 마무리될 즈음... 마드리드의 찬란한 저녁 불빛이 보였다.
입국 심사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영화의 한 장면이 시작되었다. 한쪽 허리에 손을 얹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보안요원은, 25년 10월부터 쉥겐 지역에 입국하는 비 EU 국적자는 새로운 디지털 출입국 시스템(EES), 생체 정보 등록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키오스크에서 셀프로 여권을 스캔하고, 지문 및 얼굴사진을 등록해야 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기계에서 계속 오류가 뜨면서 진척이 안된다. 얼마가 지났을까... 한동안의 논의가 오가더니, 입국 심사관 쪽으로 줄을 바꿔 세운다. 다행히, 입국심사대만 통과해서 나올 수 있었다. 하마터면, 공항에서 날 샐 뻔했다.
40분 넘게 기다려 수화물을 찾았다. 2시간 넘게 공항 출구에서 기다릴 아들을 생각하니 애가 탔다.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던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5개월 만에 상봉이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기다림이 얼마나 지루했을지... 마음이 뭉클하다.
숙소로 가기 위한 택시를 타기 위해, 바라하스 공항 건너편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볼트 전용 구역에서 밴을 콜 했다. 우버 구역과 볼트 구역의 표기가 있다. 까만색 벤츠 밴이 미끄러지듯이 와서 멈추는가 했는데, 까만 머리를 기름칠해서 딱 붙이고, 올블랙 슈트정장에 뾰족한 까만 구두까지 깔맞춤 한 젊은 신사는 조용히 짐을 실었다. 그 근엄한 포스에 약간 당황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달리고 있는데,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을 깨고, 흑기사의 휴대폰벨이 울렸다. 그리고, 그 후 20여분을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면서 운전하는데, 불안 불안했다. 나는 여태껏 이렇게 말을 쉴 새 없이, 빠르게, 많이 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이제나 저제나 끝날까 하는 통화는 우리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며, 남편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스페인어로 계속해서 통화하고 있는 그 흑기사의 모습을 뒤로하며, 우리는 비로소, 무사히 마드리드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