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박물관이자, 현재에도 역사가 쓰여지고 있는 곳
어제 일찍 잠들어서인지 새벽 일찍 눈이 뜨였다. 묵직한 발코니창을 살짝 밖으로 밀어보니, 마치 낙엽을 태우는듯한 아릿한 냄새가 새벽공기를 타고 코끝에 와닿는다. 아마도 숙소 바로 아래쪽에 있던 군밤장수 할머니의 포차에서 밤새 굽던 밤과 옥수수 냄새였을까...
어제 들어오면서 사온 군밤 몇 알과 함께 모닝커피를 마셨다. 군밤맛은 어딜 가도 비슷한가 보다. 스페인에도 군밤과 구운 옥수수를 팔 줄은 몰랐다. 잠시 우리 동네 생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렇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아침으로 햇반과 간편국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마드리드 왕궁을 보기 위해 나섰다. 아들은 학교 시험이 끝나는 데로,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나와 남편은 유럽의 아침 골목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마드리드 왕궁도 숙소에서 걸어서 20~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길을 나서니, 이국적인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젯밤의 그 화려함과 시끌벅적함은 어디에 갔는지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아니다. 적막이란 단어는 빼기로 하자. 이렇듯 알록달록한데...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어젯밤의 솔광장은 어디 갔는지... 그 광장이 아닌 듯 지금은 너무 조용하고 한산하다. 아직 도시가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스페인의 계몽군주이자, '카를로스 3세'의 기마상과도 마음속으로 아침 인사를 나눈다.
'부에노스 디아스!'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다. 여기는 우리나라보다 출근시간도 한두 시간쯤 늦는 것 같다. 바쁘게 서두르는 움직임이 많이 안 보인다.
구글맵을 켜고, 마드리드의 골목길들을 걸으며, 특징 있는 건물과 장식들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는 동안 마드리드 왕궁 앞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뒤적여 미리 예매해 두었던 온라인 티켓을 꺼내어 줄을 섰다. 10시로 예약해서인지 대기줄이 얼마 없다. 줄도 금방 서고 보안검색도 후딱 마친 후 광장 쪽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광장에 들어서서 마주한 마드리드 왕궁의 첫인상은 차분하고 단정한 느낌이랄까. 길게 이어진 건축물에 규칙적으로 배열된 창문들이 만들어 내는 균형과 비례의 절제된 느낌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더불어, 기둥마다 서있는 조각상들과 장식들도 매우 섬세한 대비감을 이루고 있었다.
마드리드 왕궁은 18세기 초 펠리페 5세 때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큰 왕궁이다. 면적이 약 135,000제곱미터에 방이 3,418개나 되며, 그중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방은 50개 정도라고 한다.
1734년 목조성이었던 이슬람제국의 알카사르가 화재로 전소되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였으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던 펠리페 5세는 그 자리에 이탈리아의 거장들을 불러들여 유럽에서 가장 웅장한 궁전을 기획했다. 처음 설계를 맡은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ra)'는 건축 시작 전 사망했으며, 그 뒤를 제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사케티(Giovanni Battista Sacchetti)'가 이어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했다. 그 후 1764년 카를로스 3세 때 완공 되었다.
화재를 대비하여 '불연성 건축'에 집중했던 만큼 외관은 나무를 배제하고, 백색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여기에, 고전주의적 절제미와 바로크의 화려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묵직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차분하고 단정했던 외관의 모습과는 달리 내부로 들어서면 왕궁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입구에 들어서면 '프란체스코 사바티니(Francesco Sabatini)'가 설계한 거대한 중앙 계단이 있다. 넓고 완만한 대리석 계단이 위층으로 이어지고, 고개를 들면 '코라도 자퀸토(Corrado Giaquinto)'의 거대한 천장화가 펼쳐진다. 천장 전체를 덮은 거대한 프레스코화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는 것이 마치 18세기 스페인 제국의 화려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부 장식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로코코 양식이 가미되어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로마 황제 복장을 하고 있는 스페인 계몽군주 '카를로스 3세(Carlos III)'의 조각상이 입구 쪽에 있다. 그는 마드리드의 도로, 조명, 하수도 시스템들을 정비하여 현대적인 도시의 인프라를 깔았다. 이로 인해 '마드리드 최고의 시장'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복도의 정면 외벽 쪽에도 역대 군주들의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통합의 발판을 마련하고,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켜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국토 회복)'를 완수했으며,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하여 '대항해 시대'를 연 '이사벨 1세' 여왕의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드레스와 망토, 레이스의 섬세한 표현과 장식이 돌로 조각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한 땀 한 땀 장인의 디테일이 대단하다.
왕궁의 방들은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미술관 같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왕좌의 방(Salón del Trono)'과 '가스파리니 방(Salón de Gasparini)'이다.
'왕좌의 방(Salón del Trono)'은 국왕이 공식 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천장에는 18세기 유럽 최고의 프레스코 화가이자 로코코 양식의 마지막 거장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스페인 군주국의 영광'이 그려져 있다. 당대 스페인이 품었던 세계관을 압축해 놓았다고 할까.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붉은 벨벳 벽면과 거대한 거울,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어우러져 스페인 왕실의 위엄과 황금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가스파리니 방(Salón de Gasparini)'은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정점을 찍으며, 마드리드 왕궁에서 가장 화려한 방 중 하나이다. 벽면 장식이 실크 자수라니... 그 밖에도 도자기 장식, 정교하게 세공된 가구들은 당시 장인들이 바쳤던 헌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예술은 곧 권력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수단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 외에도, 수많은 회화예술 작품과 함께, 다채로운 색실과 무늬로 정교하게 그림을 짜 넣은 두꺼운 태피스트리(Tapestry)는 마치 벽에 걸린 거대한 벽화 같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100여 개가 넘는 좌석, 호화로운 은제 식기와 크리스털잔, 도자기가 아름다운 연회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다.
방마다 색과 분위기도 다르다. 어떤 방은 붉은 색조로 화려하고, 어떤 방은 황금빛 장식으로 빛나는 예술 공간이다. 회화, 조각, 장식, 가구까지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인상적이었던 곳은 알폰소 7세의 으리으리한 흡연실, 내부구역이 완전히 공개되지 않아 창으로만 들여다보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런 방들이 50여 개라니 걸었다 쉬었다 반복하며 보아도 다 새로운 것들뿐이다. 내부 촬영이 금지된 곳들이 대부분이라 다 담지 못함이 아쉽다.
악기 박물관에서 전 세계를 통틀어 몇 점 남지 않은 300년 넘은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를 직접 본 것도 감동이었다. 음악 애호가였던 카를로스 4세가 왕세자 시절부터 수십 년에 걸쳐 하나씩 수집해 완성한 '팔라티노(Palatino)' 5중주 세트는 지금도 왕실 음악회등에서 실제로 연주된다니, 그 천상의 소리가 궁금하다.
마드리드 왕궁은 현재 국왕 가족이 거주하지는 않고, 평소에는 박물관처럼 여행객들의 관람이 이루어지며, 국가 행사와 의식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외교 사절들이 이 복도를 지나, 각종 조약을 체결하고, 왕의 연회장에서는 만찬이 열린다. 지금도 현대의 중요한 스페인 역사가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했던 무적함대의 기세는 꺾였지만, 그들이 남긴 권력의 건축, 화려한 예술의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견고하다. 절대권력은 유한할지라도, 그것을 기록한 예술과 역사는 영원하다는 것을 마드리드 궁전은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왕과 귀족들이 이 궁전을 지나갔고, 그들의 시대는 이미 사라졌지만 궁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대리석벽과 천장화, 그리고 수많은 방들과 화려한 보물들 속에 그 역사의 순간들은 영원히 담겨 있을 것이다. 남편과 나는 단순히 관광지를 둘러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와 예술의 숲을 잠시 걸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늘도, 많은 여행자들이 그 역사의 시간 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