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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메르트리 Jan 11. 2024

05. 아름답게 헤어지기

놓아주기도 연습이 필요하다

'야호, 방학이다!'

즐거운 일이 가득 일어날 것만 같은 방학이 되었지만 시간이 남아도는 두 녀석은 "엄마, 심심해"라며 종일 달라붙습니다.


아침 공부도 야무지게 다 했고, 오늘 계획표 대로 척척 움직였건만 그토록 원했던 자유 시간에 할 거리가 똑떨어진 아이들입니다.


보드게임을 할까, 빨래를 같이 갤까 고민하다 갑자기 이참에 장난감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유치해져서 가지고 놀지 않는 놀잇감이 꽤 많거든요. 부서지거나 망가져서 버려야 할 것들도 있고요. 이럴 땐 생각난 김에 해버리는 것이 최고입니다.


"얘들아~ 일로 와봐."

아이들이 듣기에 제가 꽤 신나 보였나 봅니다. 뭔가 엄마가 재밌는 놀이를 하자고 할 줄 알고 쪼르르 달려왔는데 20L 종량제 봉투를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더라고요.

"자, 이제 우리 장난감 정리할 거야. 이거 들고 집구석구석 보면서 최근 두 달 동안 가지고 놀지 않았던 장난감들은 여기 넣어와."

"그럼 그거 버릴 거야?"

"응.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거니까 빠이빠이 해야지."

제가 여지두지 않고 말하니 아이들도 놀란 눈치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자~ 출발!"

아이들에게 미션을 주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있으니 둘이 장난감 통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형아 이거 갖고 놀 거야?"

"너 이거 두 달 안에 가지고 놀았어? 야야, 그건 버리면 안 되지!"

"나 이거는 필요 없어."


나름 심각해요. 진지한 회의를 이어가며 봉투 안을 열심히 채웁니다.

다른 방으로 옮겨 가더니 거기서는 더 안타까운 한숨이 들려오네요. 그 방에는 한때 애정했던 변신 로봇들이 가득하기 때문일 거예요.


얼마 지나자 아이들이 이제 다 했다며 봉투를 들고 왔습니다. 반쯤 채워 왔는데 제 예상보다는 많이 채웠습니다. 변신 로봇 두 개, 팽이, 말 장난감, 에버랜드에서 샀던 기념품, 교구 등이 들어있네요. '이 정도나 버릴 수 있는 거였어?' 생각보다 과감해진 아이들입니다.


저에게 봉투를 건네고 돌아서는 순간 범이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영 싸합니다. 설마... 하며 따라 들어가니 안경 너머 눈물을 훔치며 어깨를 들썩이는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범이는 눈물이 났습니다.

애써 참으려 했는데 제가 들어가니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어요. 장난감을 하나씩 봉투에 담을 때마다 슬픔이 차올랐던 것입니다.

"왜 울어....." 이유를 알면서도 묻게 되더라고요.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요.

범이는 버려지는 로봇이 불쌍해서라고도 했다가 헤어져서 슬프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사주신 로봇인데 그동안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떠오른 것이었지요. 곁에 함께 있던 호야도 덩달아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 아이들은 물건과 잘 헤어지지 못해요. 특히 범이가 그렇습니다. 늘 버릴 때마다 힘들었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아이가 그린 그림, 만들기 작품부터 시작해서 책, 장난감, 학용품 뭔가를 쓰레기통에 넣는 모습을 들킬 때마다 저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어요. 최근에는 죄지은 것 마냥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 몰래 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예전 같으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그럼 딱 한 달만 더 두자고 제안했겠지만 오늘 저는 왠지 비장했습니다. 때가 왔다는 느낌이었어요. 아이도 이제 4학년이 되는 마당에 이런 아픔도 겪고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제 품에 안겨 울고 있지만 달래주면서 범이에게 물었어요.

"많이 슬프지... 그런데 이 로봇 앞으로 가지고 놀 것 같아?"

"아니."

"엄마가 보기에 이거 부서져서 너희가 안 가지고 논지 한참은 된 것 같은데..."

"맞아."

가만 듣고 있던 호야는 "그거 근데 멋지잖아."라고 덧붙입니다.

"그럼 너희가 선택해. 다시 잘 가지고 놀 거면 버리지 않아도 돼. 그런데 그럴 자신 없으면 버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

평소보다 단호한 말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정을 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이가 변화한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새 컸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버리지 말라고 하던 아이였습니다.

구구절절 왜 버려야 하는지 설명을 해도 "그래도 안 돼. 이제 다시 가지고 놀 거야"라고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슬픔을 느끼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펼쳐 보일 수 있게 쑥 커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이 마음은 아프지만 아름답게 헤어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범이는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중이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습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도 그렇습니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가사처럼 누군가와도 이별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할 때가 있어요.


아이를 안아주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희들과도 함께한 기억을 간직한 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겠지'


지금 키운 세월만큼만 더 키우면 아이도 성인이 됩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요.

그 순간이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지만 헤어짐이 싫어 두고두고 곁에 끼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 독립하여 나와 떨어질 것이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변신 로봇과의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잘 보내주는 범이처럼, 저도 아이들과의 추억을 소중히 품고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럴 순간이 올 거라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고이더라고요.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아이들과 서로 나누는 감정을 나누는 이 순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간직하고 싶어 아이를 꽉 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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