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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Aug 23. 2024

 고마까시

결혼 18년 차 일기

고마까시   2018년 6월 27일


 오늘도 괜히 아내와 싸울 뻔했다.

아내의 사랑스러운 투정에도 내 자존심이 상해 싸움을 걸려고 했다.

지난 두 달 동안 고시원 입실료 중 현금으로 받은 50만 원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사용했는데, 아내가 눈치를 챘다. 이번 달도 어물쩍 쓰려했더니 꼬치꼬치 캐물어 아내 통장에 입금해 주고 나니 자존심이 상했다.


 몇 달 전부터 고시원 운영이 어려워 용돈을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을 했지만, 체면이 구겨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도 거짓말하지 않는 척을 해왔는데 두 달 몰래 사용한 것도 창피했고, 그걸 모른 척 눈감아 주지 않는 아내도 원망스러웠다. 그래봤자 아이들 용돈이나 고시원 비품 살 때 쓰는 돈이지, 곳에 쓰는 것은 없어 억울할 노릇이었다. 주식계좌에 이삼십 만원씩 이체하는 것을 빼면 말이다.


 아내가 모른 척 넘어가 주나 했는데, 막내를 데리러 갈려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사건이 발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윗집 아줌마가 우리 부부 들으라는 듯이 통화를 하면서 "우리 남편 주식으로 10억 벌었잖아"라는 통화를 하며 내렸다. 그러자 아내도 나를 바라보고 웃으며 "우리 남편 매일 고마까시 하잖아"라고 기습적인 농담을 던졌다. 나는 반박도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했다.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마음이 차갑게 식으면서 아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얼마나 돈을 가져갔다고 저러는지 미웠고, 허튼데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러는 게 싫었고, 

남편 치부를 들추어내는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막내와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제 여기서 "넌 도대체 왜 그러냐?"라는 말을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다음 상황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는 구구절절 당신을 믿었는데 그럴 수 있냐며 옳은 소리만 골라서 할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나 같은 남자가 어디 있냐며 왜 이렇게 남자를 숨 막히게 하냐고 언성을 높일 것이다.


 그러다 규은이가 오면 싸움을 멈추고 냉랭해진 분위기로 집을 갈 것이다.

그냥 자존심 한번 구기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아내를 공격할 것인지의 기로에서 나는 아내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을 보는데 막내가 활짝 웃는 얼굴로 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아내도 뭐라고 하며 차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규은이가 시험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재잘대자 서먹했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규은이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큰일 뻔했다고 안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자존심 상하고 쪽팔린 감정도 그때뿐이고, 내가 감수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흘러가는 강물에 떠있는 쓰레기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내 감정을 대단한 것인 양 아내에게 표출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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