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을 깎다가 - 김석희 작
봄날의 예교리 고급과정 수업
3월 첫 주의 주말은 딱 봄날 같았다. 화창한 날씨와 따뜻한 태양빛이 몽글몽글 피어나며 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이제 봄이구나.’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예교리 고급과정 두 번째 수업이 있는 날이었고, 오프라인 강의가 문래동 한점 갤러리에서 진행되었다. 줌으로만 보던 동기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함께,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졌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의자 셋팅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둘러 출발했다. 족히 1시간 40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지영샘과 함께 의자를 나르고, 동기들을 위한 자리를 정리했다. 한 분, 두 분, 줌 화면에서만 보던 얼굴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들어왔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우리는 예교리 고급반 4기로 오래 함께할 동기들이었다.
하나둘 자리에 착석하니, 넓지 않은 한점 갤러리가 어느새 가득 찼다. 이미 두 번째 글쓰기로 ‘나를 표현하는 그림 한 점’이라는 주제의 글을 공유한 상태였기에, 서로가 어떤 이유로 이 수업을 듣게 되었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 만났음에도 결코 낯설거나 서먹하지 않았다. 이번 수업을 위해 제주에서 세 분, 양산에서 한 분이 올라왔고, 서울과 인근 도시에서 모인 인원을 포함해 총 15명이 함께했다. 다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지영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작가와 함께한 갤러리 투어
동기생들은 세 개 조로 나뉘어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특히 이번 초대전에서는 작가가 직접 도슨트 역할을 맡아 자신의 작품을 설명해 주었는데, 덕분에 그림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는 계란판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먼저 알려졌고 이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며 전업 화가가 아닌 작가로 활동해 오고 있었다. 또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번역 작가이기도 해서, 그림을 시와 접목해 설명해 주었다.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글로 남겨지면 시가 되고, 붓으로 표현되면 그림이 됩니다.”
그의 말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초대전의 제목은 ‘The poetic’였다. 모든 작품이 시적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가장 편안한 순간, 발톱을 깎는 시간
그중에서도 유독 편하게 다가오는 그림 한 점이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고요함과 내면의 평온함이었다. 발톱을 깎는 행위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이지만, 그만큼 인간이 가장 편안하고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 장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낸 것은 “가장 소소한 순간이 오히려 가장 평화롭다” 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는 항상 집에서 발톱을 깎았고, 주로 가족이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톱이 어디로 튈지 몰라 거실에 신문지를 넓게 펼쳐두고 혼자 깎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발톱을 깎는 그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평화로운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닌 이상, 누구 앞에서든 발을 보이며 발톱을 깎았던 적이 없었다.
작가는 이 점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평화로운 시간. 누구나 그런 시간을 꿈꾸고, 그런 삶을 바라며 살아간다. 그 보이지 않는 평화와 편안함을 ‘발톱’이라는 소재로 너무나 확실하게 표현해 내고 있었다.
“기가 막힌 감성과 소재의 선택이구나.”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발톱을 깎으며, 오늘 본 그 그림 한 점을 떠올릴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평화롭고, 온전히 편안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