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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스빈 Jul 16. 2024

프란다스의 개, 네로가 사랑한 명화

루벤스의 명화


유년시절의 만화 영화


프란다스의 개 마지막 장면




네로는 왜 그 그림에 애착을 갖고 보고 싶어 했을까요?
그림 공부(?)를 하면서 내가 아는 보았던 기억에 남는 그림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너무도 오래된 유년의 빛바랜 기억 속 따뜻하게 노랗게 밝아오는 와사등 불빛처럼 내 기억의 언덕을 타고 금방 가슴을 촉촉하게 했던 그 기억!
요즘 초등학생들이야 학교 마치면 이학원 저 학원으로 다니기 바쁘고 예능에 체육에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내가 국민학교시절에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티브이에 나오는 만화영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와 내가 살았던 그 시대를 비교하면 당연히 훨씬 더 부유하고 삶의 질도 월등히 나아졌지만 지금도 그때의 향수가 그리운 건 추억이어서 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만화 영화 중 기억나는 제목이 엄마 찾아 삼만리, 캔디, 로보트 태권브이, 마징가 Z, 아톰 등 생각해 보니 많은 만화영화가 떠오릅니다. 그 외에도 미래소년 코난, 독수리 오형제 등도 이후에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세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중 프란다스의 개는 유년시절 본 만화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영화입니다. 방과 후 프란다스의 개를 보며 네로와 아로아 그리고 파트라슈가 함께하는 행복한 모습에 매료도 되었고, 때론 네로를 괴롭히는 아로아 아빠에 적괘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늘 할아버지를 도우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네로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중 프란다스의 개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언제 적 일인데 잊힌 줄로만 알았던 그 시절 방과 후 집에서 혼자 보며 울었던 그 기억이 왜 이리 선명히 다가오는 걸까요?  네로는 그 그림을 너무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커튼으로 장막이 쳐진 그 그림은 돈을 지불해야만 볼 수 있는 그림이었고 늘 가난했던 네로는 그 그림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결국 꿈에도 그리던 그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며 너무도 행복해하던 네로의 눈망울엔 그 그림이 마지막 환영으로 남아 눈을 감습니다. 그땐 그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도 모른 체 보았습니다. 대체 저 그림이 뭐길래 그토록 열망했을까요? 이 의문은 이제야 품은 거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네로의 죽음만이 다가왔습니다. 아직 죽음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유년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다시는 네로에게 일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그 생각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네로의 죽음에 눈물 흘리며 마음 아파했었습니다.




네로는 왜 그 그림을 그토록 보고파했는지 궁금해서 나도 그 그림을 찾아보았습니다.


17세기 화가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를 세움'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였습니다.


십자가를 세움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 페테르 파울 루벤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남유럽과 모국 플랑드르로 대표되는 북유럽 미술 전통을 종합하여, 빛나는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독자적인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17세기 유럽의 대표 화가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역사를 쓴 그리스도!
아마도 네로가 살아온 그 짧은 생애가 바로 십자가를 세우는 그 고통을 통해 비치지 않았을까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생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의 세상으로 떠나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네로 역시 영원한 안식을 기도했을 겁니다. 네로의 가여운 죽음을 보며 내 또래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것인 양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처럼 나 역시도 삶의 애환을 모두 내려놓고 영면의 안식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멈추게 되겠지요. 그 모든 생각들이 그때 유년의 나에게도 어렴풋이 스쳐 지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네로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그림을 나도 가만히 바라다봅니다.

두 손과 두발이 십자가에 못 박힌 체 장정들의 손에 의해 세워지는 예수의 얼굴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잔인한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성경에 쓰인 대로 예수는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렸을까요? 하느님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요? 자신의 죽음으로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걸 알았기에 뜻대로 그 길을 따라간 것일까요? 수많은 질문들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인간이라면 과연 저럴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신분!
네로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예수님의 얼굴을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요?  네로 자신이 살아온 그토록 짧고 힘들었던 삶 또한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을 보고 힘겨웠던 지난날을 모두 내려놓고 평화와 안식의 세상으로 떠나는 그의 죽음이 오히려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비록 어린 유년시절 흑백티브이로 보았던 만화영화였지만 머릿속에는 총천연색의 컬러로 남겨져있는 건 눈으로 보았지만 마음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루벤스의 그림 보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네로의 마음을 되새기며 이제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나이지만 그때의 감동으로 루벤스의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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