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국일기] "기다려 보자"라는 말이 무책임한 말인 줄 알았다.
지난달 어느 월요일 아침, "할머니 모시고 응급실 대기 중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민재와 아버지가 응급실에 할머니를 모셔갔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독일에 오기 전 가장 염려스러웠던 부분은 두 할머니의 건강이었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행여 할머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은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많이 두려웠다.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고, 하기 싫은 상상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3월에 본 할머니가 마지막일까?' '당장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나?' '안되는데... 안되는데...' 숱한 생각들이 머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은 많은데, 손에 잡히는 일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일이 없기에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위암판정 소식을 아버지께 들었다. 나는 펑펑 울었고, "아빠 우리 어떡하지?"라는 말에 아버지는 무덤덤한 괜찮다는 말투로 "기다려보자"라는 말을 하셨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때, 아버지는 늘 "지켜보자" "기다려보자"라는 말을 하셨고,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무덤덤한 말투조차 너무 싫었다. 내가 믿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너무 무책임한 사람으로 비춰보였다.
"기다려보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조급했던 나는 "뭘 기다리냐. 뭐라도 해야지, 기다린다고 뭐가 바뀌냐.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보자."라는 말을 하며 끝없이 역정을 내며 물었다. 항상 어떤 일에 부딪히면 별일 아니라는 듯 해결하던 나의 든든한 아버지는 왜, 도대체 왜 이런 큰 일 앞에서 이렇게 무책임하고 시간을 허비할까. 아버지가 "기다려보자"라는 말을 할 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할머니는 결국 혈관에 스텐트를 삽입해야 한다고 했다. 간단한 시술이지만 할머니 혈관이 약하셔서 할머니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시술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며, 할머니와 나, 서로가 '내가 지금 하는 이 영상통화가 할머니와의 마지막이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의 "걱정 마. 괜찮아"라는 말이 너무 걱정이 되고, 괜찮지가 않았다.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새로운 일, 모르는 언어 속에서 '버티자. 잘 지나갈 것이다.' '숨을 크게 쉬자.' '할만하다. 할 수 있다.'라는 말들로 인내했던 시간이 한순간 무너졌고, 눈물이 많이 났다. 통화를 마친 후에도 사무실 옆 복도에서 머리를 뜯으며 뭘 해야 할까를 계속 끝없이 고민했다.
'기도를 해야 하나? 내가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느님이라는 분은 절대 안 들어주던데. 어쩌지. 그래, 이럴 때만 찾으니까 안 들어주는 걸 거야. 부정탈지도 몰라. 하지 말자. 그래도 해야 하나?'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모든 게 절망스러운 순간 불현듯 "기다려보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할머니가 무탈히 시술받으실 거라는 믿음과 기다려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나에게는 "기다려보자"라고 하셨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셨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찾으려 하셨고,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 가장으로서 혼자서 최선을 다하셨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걸 다하시고, 더 이상 기도 말고는 그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기다려보는 것 밖에 없을 때 "기다려보자"라고 하셨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도, 지금에도 '가장'이라는 가족의 책임자로서 아버지는 할 수 있는 걸 다 하시고는, 내가 불안하지 않게 무덤덤하게 "기다려보자"라고 하셨던 것 같다.
지금 32살이 되어서야 나는 무덤덤한 "기다려보자"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무덤덤한 말투는 나의 불안함을 감싸기 위했던 말이었고. "기다려보자"는 무책임한 말이 아닌, 더 이상 내 손으로 무언가 할 수 없어서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을 때 하는 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