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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Mar 10. 2024

제 1 조: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 인생의 선장이신 하나님

시작하기 전에

이번 포스팅부터 벨직 신앙고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 포스팅의 목적은 벨직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그 역사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세운 벨직 신앙고백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세우는 것에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전달하려다 보니 벨직 신앙고백의 원 의미에서 조금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이번 제1조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다루게 되는데,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보다는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다룬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출처는 아래에 있고, 벨직 신앙고백서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찬양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추가 - 어린이를 위한 영상

어린이 동화 -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
영어 찬양 - Captain Jesus





본문

제 1 조: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 모두는 단일 본질의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보이지 아니하시며, 변하지 아니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고, 선하시며, 모든 선함의 끝없는 원천이시다.


성경

[로마서 10장 9-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

입으로 시인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0장 10절을 잘못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 받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다.


누가 선물을 준다고 해보자. 그런데 고마움 없이 당연히 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자기 생일이라는 이유로 친구를 백화점에 데려가 당연하다는 듯이 비싼 명품을 사달라고 하는 건 어떠한가? 마치 선물을 맡겨놓은 거 같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 예수님은 당연하게 나에게 구원을 주셔야 한다는 자세가 바로 이것이다. 마치 구원을 맡겨놓은 거 같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나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인식이 없을 때 우리의 모습이 딱 이러하다.


게다가 저 사람은 9절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의 주 되심이다. 예수가 내 인생의 주님이라는 고백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가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즉, 여기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이제 앞으로 내 인생의 배에서 선장은 내가 아니라 예수가 된다는 고백이다. 그렇기에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선악과 이야기

에덴 동산과 선악과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자기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생각할 수 있었던 상상의 한계가 존재했겠지만, 그 상상의 한계 내에서 아담과 하와는 모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신과 같았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유일하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주신 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죽은 사람은 커녕 죽은 동물을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즉,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뭔지 몰랐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는다는 게 뭔지 모르는 아담과 하와였기에, 선악과를 볼 때마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저걸 먹으면 죽어"
"죽는 게 뭔데?"
"죽는 게 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어."
"저걸 먹으면 죽어"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저걸 먹으면 죽어."
"누가 그래?"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마치 신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너네는 신이 아니야. 하나님이 계셔" 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즉,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볼 때마다 에덴 동산의 주인은 자신들이 아닌 하나님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들이 에덴 동산의 주인인 거 같지만, 실제 에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의 신학적 의미는 중요하다. 먼저, 선악과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만든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기 때문에, 동산 어디에 있는 선악과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악과는 이 세상의 주인이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고 만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겠다 또는 내가 주인인 세상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하던 대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만다.)


*선악과와 관련해 좀더 살펴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2139017757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0380775450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0380812869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그러면 이제 더이상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세상에서 인류는 어떻게 살았을가? 3장의 선악과 사건 이후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만다. 3장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도 깨어진다.


4장을 보면 관계가 깨어진 걸 넘어, 형이 동생을 죽인다. 5장에서는 이제 죄책감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 6장은 이것이 더 심화되어 "용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이 있었고, 누군가를 잘 죽이는 사람이 대접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용사에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2614204862


7-10장은 다들 아는 홍수 사건이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거절하고, 스스로가 주인되기를 바랐던 인류 가운데 죄가 가득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악된 인류를 청소하시고, 이제 의인들만 남았다. 그렇다면 세상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할 거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바로 바벨탑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바벨탑을 지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은 단순하게 교만했다 라고 말하지만, 11장을 보면 바벨탑을 지으려고 했던 세 가지 동기에 대해 나온다. 이 사람들은 1) 자기 뜻대로 2) 자기 이름을 위해서 3) 자기 성읍(왕국)을 지은 것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삶과는 완전히 반대 되는 모습이다.


*바벨탑에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2617477434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런 배경에서 창세기 12장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이 나온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나아갔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선장 예수의 그림이다. 배에 탔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고 선장 예수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 말이다. 바벨탑으로 인류가 완전히 실패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길 거절한,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은 나 자신이라는 바벨탑의 주민들내 인생이라는 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아브라함의 대조를 우리는 11장과 12장에서 살필 수 있다.





누가 내 삶을 이끌어야 할까?

고등학생 때 체육 실기로 포환 던지기가 있었다. 그런데 말라깽이인 나는 아무리 열심히 던져도 멀리 안 나가는 거다. 그런데 그런 내 옆에서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엄청 멀리 던지는 친구가 있었다. 거구에 키가 180이 넘었던 친구였다.


공도 누가 던지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멀리 날아가느냐가 달라진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내 인생의 선장이 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누굴 내 인생의 선장 자리에 앉혀야 되겠는가?


*누가 내 삶을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참새와 독수리라는 예화를 중심으로 잘 설명된 내용이 아래에 있다.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2495473437

https://blog.naver.com/pureshower/221694375511



P.S.

여기서 난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이상하게 오해할 거 같아서 설명을 붙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면 우리는 로봇 같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전혀 그렇지 않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다시 생각해보자.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마치 하나님 같았다. 그러나 에덴 동산의 주인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선악과를 바라보며 날마다 깨닫고 묵상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에덴 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를 무시하고 기계나 노예처럼 다루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해주신다.




생각해볼 질문들

1.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시나요?



2.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게 된다면 달라져야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3.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으로서 내가 지금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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