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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Sep 10. 2024

예배주의에 빠진 교회

예배도 우상이 될 수 있는가

Intro


어렸을 적, 예배주의에 빠진 교회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다. 특히나 새벽예배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에도 너무 많은 예배가 있는 한국 교회는 예배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사실 이것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예를 들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총신대 출신의 한 청년은 너무도 많은 예배에 질려서 이제 주일 예배 한 번 외에는 아무 것도 참석하고 싶지 않다며 청년부 예배를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게 참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까웠다. 너무 많은 예배에 질식해서, 예배가 기쁘지 않게 된 거다.)


또 한 가지 예는, 내가 총신대학교 1학년 신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과에서 엠티를 가는데, 과대라는 형이 1박2일이라는 기간 동안 예배만 열 번 가까이 잡았다. 나이 어린 동기들이 힘들어 하자, 신학생이 되어서 이게 뭐가 힘드냐는 율법주의와 예배주의에 물든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보다 나이가 꽤나 많았던 과대 형이 엠티의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보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20대의 젊은 나이였으니까 이해는 간다. 어렸을 거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신학교에 들어간 학생들 중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예배 많이 드리는 게 뭐가 나쁘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항상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예배나 하나님이냐가 그것이다. 하나님을 예배(worship)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형식적인 예배(worship service)를 많이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많이 예배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예배주의에 빠진 생각은 예배와 삶을 구분한 성속 이원론의 잘못된 생각이다.




주일학교가 예배라는 생각


한국 교회가 예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두 가지 증거가 존재한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주일학교이다. 주일학교 예배가 예배라는 생각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의 특별한 생각이다. (중고등부가 포함된) 주일학교를 소위 대예배라고 부르는 어른들의 예배가 구분 짓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고, 그리고 주일학교 예배를 대예배와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 또한 한국 교회만의 특징이다.


주일학교, 그러니까 Sunday School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주일학교는 예배가 아니다. 거의 탁아소 개념과 비슷할 정도다. 물론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와 다르게 굳이 목사가 아니어도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지도교사는 신대원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주일학교 예배 때에도 주기도문보다 축도를 해주길 원하는 모습만 해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배를 신성하게 바라보되, 대예배와 동등한 예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게 뭐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공예배라는 하나의 예배를 나이에 맞추어 쪼갠 것이 문제이다.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는 외모와 나이, 생각, 성별 등이 다 달라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예배(공예배)를 같이 드려야 하는데, 나이에 따라 예배를 나눈 것이다.


주일학교 예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이 드리는 예배도 예배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뭐, 주일학교 예배에 대한 부작용은 말할 수 없이 많기는 하다. 부서가 올라갈 때마다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함께 드리는 공예배에 적응할 수 없는 문제를 비롯 다양한 부작용들이 존재한다.


아래의 예는 그 중에 하나다. 청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소외를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주일학교의 또래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느끼는 아이들이 있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이방인으로 느껴진다는 거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대학교에서도 혼밥을 많이들 한다. (우리 시대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경우는 학생식당에서 혼밥을 할 수 있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정도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걸 불편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만큼 또래들 사이에서 소외가 있는데, 어른들도 다가오지 않는 거다.


즉, 또래들 사이에서 소외가 생기는 상황에, 청년부 예배를 공예배로부터 분리하자 문제가 발생한 거다. 아이들이 또래들 사이에서 공동체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면서, 이전에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요즘 들어서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주일학교 예배를 공예배로부터 분리하여 생긴 문제들과 부작용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제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보자. 일단 한국 교회 안에는 예배주의가 만연하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주일학교 예배를 신성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일학교 예배를 신성하게 바라보게 된 데에는 예배주의의 영향이 크다. 마치 성경책을 밟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니라 어떠한 물건을 신성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주의에 빠지면, 다시 말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배를 우상으로 삼으면 율법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진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 다음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가가 아니라, 예배를 얼마나 열심히 참석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예배와 예식


예배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또 한 가지 예는 바로 온갖 것에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예배가 너무 중요하고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이사를 갈 때에도, 개업을 할 때에도, 장례를 할 때에도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 즉, 이사 예배, 개업 예배, 결혼 예배, 장례 예배, 추모 예배 같은 다양한 혼종이 태어나 버렸다.


그러다 보니 아래의 링크에서와 같이, 많은 신학생들이 추모 예배가 가능하냐는 토론을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인데, 어떻게 정치인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무식한 소리다. (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이게 발전하면, 과연 하나님보다 결혼식이 주된 내용이 되는 결혼 예배가 가능한지 토론하게 된다. 그리고 장례 예배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원래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경우은 예배가 아니라 예식이다. 추모식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worship service)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예배의 형식을 따랐기에 예식(Ceremony)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한국 교회 성도들이 온갖 것에 예식 대신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예배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뭔가 예배를 드려야 신앙이 있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온갖 곳에 "예배"를 붙이는 것이다. 추모 예배, 결혼 예배, 임직 예배, 졸업 예배 등등 교회 헌법에도 없는 무수히 많은 유사 예배를 양산해낸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신앙은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공예배의 중요성과 가치는 하락한다. 토요일에 결혼 예배 드렸으니 예배 드린 거라고 퉁치거나, 그냥 영상으로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예배와 예식을 구분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혼란에서 해방되게 된다. 누군가 추모예배 드렸다고 "어떻게 하나님이 아니라 정치인을 예배하냐"와 같은 무식하고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무수히 많은 필요없는 논쟁이 사라지고, 일주일에 단 한 번 있는 공예배를 중요하게 바라보게 된다.




정리하며


이번 포스팅은, 예배주의가 가져오는 혼란과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예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물론 예배를 사모하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신앙이 "예배주의"라는 예배를 우상으로 삼는 잘못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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