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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Oct 10. 2024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기 전에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세상에서

Intro


교회에서 청년들을 맡아보면, 청년들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을 종종 볼 때가 있다. 물론 이것은 청년만 그런 건 아니다. 그보다 어린 학생들도 그렇고, 신앙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쉽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청년들이다. 아무래도 주일학교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들의 지도를 받기 쉬운 반면, 청년들을 거기에서 좀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비판하는 대상자들이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는다는 점이다. 교회 장로들도 그렇고 사역자들도 그렇다. 특히나 사역자들이 가장 쉬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중에서도 청년부 사역자가 이러한 비판에서 가장 취약하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었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 그 교회 청년을 담당하던 목사님이 계셨다. 성도들에게 존경받았고, 무엇보다도 청년들이 인정했던 목사님이었다. 나만 해도 목사님께 전화하여 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후에 10년쯤 지났을 때, 그 목사님과 같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여전히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었고, 나는 타부서 사역자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청년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청년들 사이에서 유독 쉽게 관찰되는 것이지만, 물론 청년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요즘의 소위 MZ세대 청년들 사이에서 더 많이 두드러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물론 그것이 요즘 세대 청년들만의 특징인 것은 아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좀더 이러한 생각이 더 잘 드러나는 이유는, 요즘 청년들이 좀더 자신들의 어린 생각을 쉽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전에는 청년들이 생각은 하더라도 (매너가 아니기에) 이야기는 안 했다면, 요즘은 그냥 한다는 거다.




단편적인 판단


그렇다면 왜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되는 걸까? 사람을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다.


실제로, 사람들이 간단하게 정죄한 사람을 만나보면,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까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에,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오해를 하는 거다. 즉, 소문만 듣고 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도 꽤 오해를 했었고, 다른 사람들도 누군가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기독교인의 관계에서, 굳이 먼저 오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될까? 요즘 점점 이것이 심화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튜브를 보면, 무슨 문제만 생기면 어떻게든 빨리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물론, 사람들이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어떻게든 해당 주제를 선점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즉, 빠른 판단을 요구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할 때, (느리더라도) 정확히 판단하는 습관을 가지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급박한 세상에서 사회는 우리에게 빠른 판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이것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하다.




영속적인 판단


또 한 가지, 청년들이 비난과 판단, 정죄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그 판단이 영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10년 전에 누군가가 굉장히 무례했다고 해보자. 10년 뒤에도 우리는 그 사람을 "무례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한다. 즉, 그 사람에 대해 한 번 한 우리의 판단이 영속적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험을 한 뒤에는 상대방을 좀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청년들의 비난과 판단, 정죄의 특징이라고 소개하도록 하겠다. 모든 청년들이 그런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든 사람들이 그런 판단을 안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 세상을 덜 알고, 덜 성숙한 사람들이 하는 판단의 특징이라는 거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꽤나 묵상을 많이 했다. 특히, 세상을 보면 쉽게 정죄하고 비난하고 악플을 다는데, 그 사람이 변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나쁘게만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한 번 그 사람의 인생을 길게 보게 되면, 우리는 성급한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 사람이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중에는 그런 실수를 고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적인 관측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실수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낙인찍게 된다.


이러한 예가 우리시대의 온라인 마녀사냥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나쁜 사람은 평생 나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종종, 우리 사회는 용서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전과자는 취업하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받아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과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괘씸히 여겨서, 전과자만이 아니라 전과자의 고용주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온라인 문화를 보며, 우리 사회는 누군가를 쉽게 용서하지도 않고, 그 사람의 주변인까지도 연좌제로 피해를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다수가 항상 맞은 게 아니며, 감정이 정의를 흐릴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일단, 성경은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을 금한다. 예를 들어서, 포퓰리즘에 빠져 여론에 의해 부당한 증언을 하는 것을 금한다. 여론이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사람이 불쌍할 때가 있다. 하지만, 가난이 정의는 아니다. 정의를 다룰 때, 감정을 쓸데없이 적재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감정이 정의를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출23:2-3]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당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종 외국인이라고 차별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좀더 좁게는, 나와 친한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경우도 종종 볼 수가 있다. 성경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가난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힘이 없는 고아나 과부, 객(내가 모르는 사람이나 외국인)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신1:16] 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신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신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렘5:28]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더라도, 상대편의 말을 듣지 않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쪽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잠18:17]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잠31:8-9] 8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


교회 안에서도 차별은 이루어진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차별하는 경우가 참 많다. 물론, 이것은 교회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문신은 거른다"라는 사람들이 꽤 많다. (예1, 예2예3 문신충) 문신, 담배, 피어싱만 걸러도 관계가 꽤 클린해진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것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성급히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 안에 여미새들이 많고.. 신앙 없이 어떻게든 여자를 자빠트리기 위해 교회 나와서 실제로 성폭행한 예들이 없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주의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약2:1-4]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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