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디 Mar 16. 2024

어쩌지, 교통안전지도

새 학기에 학부모 봉사 지원해? 말아?

#1. 3월 2주 차. 동네호프집.


불금 저녁, 애비의 “치맥 하러 나갈까?” 한 마디에 지체할 겨를도 없이 온 가족 대동단결 집을 나섰다. 저녁거리 변변치 않던 애미는 ‘아싸’하며 후다닥 나오느라 밥통의 보온을 끄고 나오지 못한 걸 마음속으로 아쉬워했다. 목적지는 동네의 허름하고 옛 추억 물씬 나는 치킨집.


으아, 얼마만의 호프집인가. 연기 모락모락 갓 튀긴 치킨에 입을 데일세라 생맥주로 목을 축이니 한 주의 고단함이 거품처럼 사라진다. 아이들은 낯선 분위기와 닭튀김의 뜨거움으로 로딩 시간이 필요했지만, 배달 치킨과는 다른 바삭함에 금세 매료되었다. 모둠소시지에서 안 매운 녀석 쏙쏙 골라내어 오물오물 잘도 먹는 짭짤한 내 새끼들.


동네 호프집 상차림 @HONG.D 찰칵


배부르다고 맥주 안주에도 소주 한 모금을 택한 애비가 기분 좋게 한 마디 한다.

“우리 건만이, 건순이가 새 학년에 학교 생활을 잘해주어서 아빠가 기쁘다.”

4학년 건만이는 별말이 없지만, 1학년 건순이는 할 말이 참 많지.

“아빠! 학교 간지 벌써 2주야. 다음 월요일이면 3주 차라고요!”

허허. 말솜씨가 제법 초딩이네.  


그렇다. 아이들도, 엄마들도 모두가 울렁거린 3월이 벌써 2주 차다. 3월의 시계는 유독 더 빠르게 돌아가는 듯하다. 다음 주에는 공개수업과 학부모총회가 있는 학교가 많지.

코로나로 대면 공개수업이 처음이었던 작년, 3학년 건만이 애미도 기대와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올해는 새끼 두 마리의 교실로 분신술을 써야 하지만 경험을 해보아서인지 다소 느긋한 심정이다.


아이들이 생소한 호프집에서 닭튀김을 뜯는 모습을 바라보며, 경험해 보는 건 무엇이든 배움이라고 추웠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2. 겨울방학. 차 안.


초등 개학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방학의 어느 날, <교통안전지킴이 설문하기>가 문자로 날아왔다. 건순이 유치원 라이딩을 가는 길이라, 가능한 날과 원하는 위치를 표시해서 급히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봄방학을 앞두고 학교에서 온 문자를 보고 머리 위로 물음표가 동동 떴다.


안녕하세요. 학교 교통안전지킴이 자원봉사자에 지원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봉사 일정표는 개학 이전에 재안내드리겠습니다.


으잉? 자원봉사? 내가? 자, 차차, 차근히 어찌 된 일인지 살펴보자. 2023년 구청에서 지원받던 학교 안전지킴이 예산이 종료되어, 학기말방학 전까지 등교하는 13일간 학부모 자원봉사를 모집하는 안내문을 이제야 발견했다. 흐흐. 내 손으로 잽싸게 봉사신청을 했구나. 아무렴 어떠리. 기왕이면 신나고 안전한 하굣길 그린맘이 되어보자.




#3. 영하 7도 강추위. 하굣길.

영하7도 강추위에 교통지도 @HONG.D


교통안전지킴이가 당첨된 날은 영하의 날씨요, 위치는 그늘진 바람골이었다. 학교 앞 큰 횡단보도가 아닌, 아파트 입구의 뒷길이라 차량통행과 보행자가 많지는 않다. 그래도 코너에 오르막이라 위험 요소가 꽤 있는 자리이다.

어쩌다 하게 된 봉사지만, 패기 당당하게 롱패딩과 핫팩으로 무장하고 노란색 녹색어머니 깃발을 들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으로 몸을 녹이고 컵을 기둥 옆에 놓아두자, 아이들이 북적북적 언덕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게임하는 아이를 보며 위험해 보여 걱정이 앞서고, 영하의 추위에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친구들에게 엄지를 치켜주었다.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초딩 여학생들의 패션을 구경하며, 입학을 앞둔 건순이에게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까, 옷, 책가방, 신발 구경 실컷 했다. 머리도 어쩌면 그리 예쁘게들 묶었는지, 아가처럼 땋지 않고 단단하고 스타일 나게 묶어줘야겠다 싶었다.

건만이도 저만할 때가 있었지 하며, 1학년 꼬맹이들이 귀여워 연신 미소를 지었다. 슬릭백(Slickback, 공중에 떠 있는 추는 유행하는 춤)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를 보고는 건만이도 보나 마나 저러고 다니겠지 싶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해 주는 친구, 폰을 잃어버려서 엄마에게 잔뜩 혼나고 우는 아이, 아이돌 뺨치도록 설레게 멋진 고학년 남학생,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멋 부린 여학생, 녹색어머니 깃발을 펼치고 접으며 참말로 재미있더라. 어쩌다 봉사활동이 이렇게 감성적이고 감사하다니.


그러던 나를 향해 한 신사분이 조심스레 다가오신다. 어머, 교장 선생님이시네!

“안녕하세요. 건만이 어머니세요? 추운 날 이렇게 아이들 위해 봉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이 이름까지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주시는 정성에 감동했다. 학교 주변을 감사인사와 함께 순찰하고 계시는 교장 선생님도 감기조심하세요호홍홍.


교통지도가 끝나갈 시간이 다가오니, 단지 옆 중학교의 하교가 시작되었다. 트레이닝 교복을 입고 시커먼 남학생이 땅을 보며 걸어온다. 노란 깃발을 펼쳐 건너라고 해주니, 걷다가 부러 멈추어서 고개를 숙여 무음인사를 해준다. 기특하고 고마운 아이에게 JYP 버전으로 ‘어머님이 누구니’를 불러주고 싶더라. 눈까지 가려진 앞머리만 보아도 ‘나 사춘기야’가 풍기는 중딩형아에게서 건만이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정해진 봉사 시간을 마무리하고 노란 조끼를 벗어 접었다. 깃발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기둥에 올려둔 커피를 호로록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아이스로 업그레이드되어있네. 추웠던 마음이 따스해져 마침맞은 온도로 카페인이 수혈되었다. 이까짓 교통지도, 이렇게 감성충만이라면 강추위에 강추는 못해도 기회 되면 추천한다.




#4. 다시 3월 2주 차. 차 안.


아이들 학교의 24년도 교통지도는 모든 학부모의 년 1회 필수활동이 되었다. 새 학기를 맞아 독서지원단, 급식모니터단 등 이런저런 봉사를 신청받더라. 다음 주 총회를 앞두고 1학년 건순이 담임 선생님께서는 미리 봉사지원할 멤버를 모집하셨다. 총회 당일 대면으로는 데면데면하여 쉬이 정하기 어려울 수 있지.

알림장이 지잉 울렸다.

도서관 독서지원단 두 분 선착으로 신청받습니다! 도서관 명예 교사 봉사를 하시면 학교에 비치되어 있는 도서 목록을 보실 수 있고, 아이들이 도서관 활용을 더욱 활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선착순에 안달이지 @HONG.D


왜 선착순이라 하면 물이고 불이고 달려드는가. 쓸데없이 잽싸다. 이런 ABC…K애미야. 아싸, 도서관 봉사도 해본다. 건만이 1~2학년 때에는 워킹맘이어서 해주지 못했던 일, 건순아, 이제 백수 애미가 얼마든지 지원해볼게.


학부모 독서지원단 어떤 내용인가 안내문을 꼼꼼히 살펴보자. 활동 내용은 도서정리 및 소독, 반납 안내구나. 시간은 11:00~13:00 하루 2시간씩, 1년에 4~5회 봉사라고라고라고? 아, 한 번이 아니었구나. 흐흐. 어쩌다 네댓 번을 또 감상에 빠져들어 보련다.




교통안전지킴이 봉사활동 소정의 답례품 @HONG.D 찰칵


+덧이야기.

“엄마! 엄마! 대박이야!”

학년말 방학식날, 건만이가 하교 후 집으로 뛰어들어오며 소란스럽다. 반배정이 어찌 되었길래 그러한가 귀를 쫑긋해 주었다.

“엄마! 나 오늘 처음으로 교무실에 가봤잖아! 이거 엄마께 가져다 드리래요. 엄마 덕분에 나만 교무실 가본 거야. 최고지.”

아이에게는 교무실에 가본 일이 반배정보다 ‘세상에 이런 일’이구나. 어쩌다 교통지도가 건만이까지 뿌듯했던 감사한 경험이었네.


학교님, 답례품으로 주신 히말라야 핑크솔트와 통깨는 아주 예쁘고 맛나게 뿌려먹고 있답니다. 이렇게 심쿵 센스만점 선물을 다 주시고 학교봉사활동 앞으로도 감사히 해볼게요호홍홍.



오늘도 일상을 배워가는 길=STREET DESIGN.

매거진의 이전글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