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슈리다르
1980년대 말부터 동구권 사회주의는 몰락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 속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비롯해 혼동의 시기를 보낸 세르비아는
러시아와 서구국가 간 관계유지를 노력하고, 유럽연합(EU) 가입을 목표로 하면서
현대 국가로 나아갈 발판을 노력한다.
검은 까마귀는 부서진 가로등에 앉아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회색빛의 오래된 아파트 위를 향해 비행한다.
과거 상처를 딛고자 하는 과정 속 걷는 세르비아의 거리를 걷는다.
공산사회 몰락의 잔재가 남은 길을 걷노라면
조금은 우중충하면서도
그런 낡음에도
느리고 오래된 미학이 나온다.
낡은 미학을 가진 잿빛 건물을 지나
카우치서핑으로 연락 온 이를 만나러 간다.
그는 슈리다르(Shridhar)라는 본명을 숨기며
영화제작자(filmmaker)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영화를 제작하나 보네요!
저도 미디어 전공생으로 영화제작을 배우고 있어요."
그가 진정으로 영화 제작자라니!
영화 진로를 꿈꾸며 실제 제작자를 만났다는 사실은
그를 향해 수많은 물음표를 만든다.
영화 제작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
배우와 동업자를 어떻게 구하는지,
나쁜 영화와 나쁜 이야기는 무엇인지.
영화와 관련한 물음들은 이내 그의 삶을 향해 이어진다.
"어떤 삶을 살아왔어요?"
인도 첸나이에서 태어난 그는
인도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마쳤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경영 석사를 졸업했다.
자본을 모으기 위해 시작한 경영학 공부로
싱가포르에서 일을 하다 영국으로 넘어갔다.
"싱가포르에서 컨설턴트로 일할 때는 매우 지루했지.
비즈니스잖아.
매일 돈을 만들기 위해서 일했지.
그 당시에는 나의 진정한 열정이 뭔지 몰랐어.
그 밖 모든 건 돈이었지."
2년 동안 영국에서 일하던 그에게 든 생각은 하나.
'다른 이를 위해 일하는 게 싫다.'
모은 자본금으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본인의 회사를 세우기 위해 세르비아로 넘어왔다.
비용적면에서 회사 세우기에 적합했던 세르비아에서 그는
IT회사, 패션마케팅 회사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다.
운영 중인 그의 여러 산업 속에서
그는 영화 산업계에 뛰어들어 프로덕션의 꿈을 가졌다.
"삶은 아름다워
하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전쟁, 질병 등 세상을 이루는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사람들에게 행복을 말하는 영화제작을 실천 중인 그.
어린아이를 위한 영화를 줄곧 만드는 그는
전쟁, 질병 등 부정적인 말로 가득한 오늘날에서
어린이에게 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약과 도박 없이도 즐길 줄 아는 존재야.
나는 사람들이 웃는 걸 보는 게 좋은걸.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거야. "
그가 영화 제작을 시작한 지 어엿 10년,
러시아, 세르비아, 인도, 싱가포르 등
국제적으로 영화 제작을 펼쳐나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생각한다.
영화 업계로 나아가면 펼쳐지는 내 미래와도 같을까.
슈리다르의 모습을 보며 내 미래를 그려본다.
과거 몰락의 아픔과 현재가 어우러진 베오그라드는
중심가에 아늑한 카페테리아가 즐비하다.
우린 한 야외 의자에 앉아 핫케익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본국(인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나의 국가는 영국이야
부모님이 인도에 계시고, 나도 인도에서 자라왔지만
인도에서 살기는 힘들어.
유럽에서의 삶은 쉽고, 편하고, 안전하지.
2시간이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지금까지의 과정 속에서 힘든 적은 없었어요?"
"힘든 적이야 많지.
삶은 언제나 힘든 일의 연속이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회사를 설립한 초창기에 그는 하루 14시간 동안 일을 했다.
그가 젊은 시절 겪어온 노력의 순간이 떠오른다.
그가 넘은 젊은 시절의 산이 있기에
지금의 평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겠지.
등산의 기쁨은 정상을 정복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기쁨은 험준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할수록 가슴이 설렌다.
인생에서 고난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보다 삭막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는 젊은 날에 산을 올라야 한다.
젊음은 그 자체가 거대한 산이기도 하다.
그 산이 평지가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올라야 한다.
젊은 시절에 자신의 산을 오른 자는 늙어서 산의 풍성함을 맛보게 된다.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문득 이름 모를 한 여인의 말이 떠오른다.
'부지런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로 인해
먼 거리에 집을 얻어 매일 센터로 가야 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 집에 들어오곤 하지.
젊을 때 부지런하지 않아 결국 늙어서야 부지런해지는 거야.'
인생이란 파노라마 속에서
부지런함도 공평하게 주어지는 걸까.
젊을 때 나를 위한 부지런함으로,
나의 게으름을 얻어야 하는구나.
그가 개척해 낸 현실의 삶을 바라보며
오로지 나를 위한 부지런함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조금은 불타오르는걸 눈치챘는지
그는 말을 덧붙이며 웃는다.
"게으른 건 똑똑해지는데 도움이 돼.
문제를 간단하게 보게 해 주거든."
우린 세르비아의 거리를 함께 걷기 시작한다.
세르비아에 10년 넘게 살아온 그가 이끄는 대로 세르비아 곳곳을 걷는다.
화창한 날씨를 반기는 공원의 나무,
동유럽 풍의 교통체계,
세르비아 역사를 품은 고풍스러운 종교건축물까지.
그는 세르비아 곳곳을 가이드하며 우주를 공유한다.
"슈리 다르만의 길을 가는 과정이
어렵지 않았어요?"
"쉽다는 것의 의미가 뭔데?"
"쉽다는 건 …
그걸 해내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고,
어떠한 문제도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하는 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네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쉽지 않아야 해.
삶은 도전이야.
그 도전을 즐겨.
그때만이 우리가 삶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지."
훗날 영화 연출을 꿈 중에 하나로 갖고 있는 나는
그의 발자취를 보며 질문 꾸러미를 잔뜩 만든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내게
자기 삶을 기반으로 우러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만약 네가 스토리텔링에 관심 있다면,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어떤 방법을 쓸지 생각해야 해.
사람들이 너를 “데이지는 좋은 이야기텔러야."라고 말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할 건지 말이야."
우리의 발걸음은 쇼핑센터를 지나,
아름답게 흐르는 다뉴브 강을 바라본다.
다뉴브 강 앞 벤치에 자연스레 앉는다.
"데이지, 너는 앞으로 정말 많이 투쟁할 거야.
사람은 누구나 넘어지지.
그렇지만, 실패자는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야.
넘어지고 나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지."
"포기하지 않게 만든 힘은 뭐예요?"
"매일의 순간이지."
"삶에서 가장 최고의 경험은 뭐였어요?"
"정말 많은 최고의 경험들이 있지.
그중 하나는 가족과 함께 여행 갔던 ···."
그는 자기 인생의 필름을 다시 돌려보듯이
잠시동안 생각에 빠지더니 말한다.
"그래도,
영화관에서 처음 내 영화를 상영했을 때를 잊을 수 없지.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고 웃을 때 정말 좋았어.
너는?"
"음..
나는.. 지금 생각나는 건..
수능에서 저의 목표를 이루었을 때가 생각나네.
아, 수험생 시절에 하루 종일 공부하고 돌아와서
엄마가 제 생일을 축하해 줬던 순간도 좋았어요.
터키에서의 패러글라이딩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요 ···"
우린 한참을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삶에서 좋았던 순간,
삶에서 신기했던 순간,
삶에서 슬펐던 순간,
이야기 말미에 우린 동시에 말한다.
"삶은 정말 놀라운 거 같아."
"그렇죠. 삶은 참 아름다워요."
"긍정적인 사람들이 너 주위에 있다면,
그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지."
눈앞에 펼쳐지는 다뉴브 강에
햇빛이 반짝거리며 비춘다
물끄러미 윤슬을 바라보면서
나는 슈리다르에게 묻는다.
"삶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나요?"
그는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해왔다는 듯
내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말한다.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마.
오직 너 자신만 너는 판단할 수 있어."
"가치는 너의 경험에 따라 바뀌는 거야.
네가 배울수록 가치도 달라지지.
매 순간 너는 같은 사람이 아니야.
어제 규정한 너를 따라가려고 하지 마.
그저, 오늘의 너를 살아.
도전하고,
너의 사고방식을 열어두고
새로운 감정에
새로운 경험에
새로운 방법에
무한한 가능성을 두는 거야.
다른 이들이 너에 대해 판단하는 건
결코 중요하지 않아."
그는 삶에 대해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자기의 언어로
마음 깊이 품고 있다.
"데이지, 강 위를 떠다니는 배에 있다고 생각해 봐.
다음에 너는 어디로 갈지 몰라.
우린 배를 타고 나아가다 하나에 부딪히지.
부딪힌 방향을 타고 나아가면서 생각하지.
어? 괜찮네?
그럼 그 방향으로 가는 거야.
네가 느끼고, 보고, 듣는 걸 따라가는 거지.
그런 식으로 나아가며 하나의 항해를 해나가는 거야.
그게 삶이지.
삶의 한 가지 이유는 없어.
복합적인 이유이지.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야.
그 끝에서 우린 모두 죽지.
그게 삶이야.
그게 다야."
미리 목적지를 정한 항해는 멍청한 일이라고 말하는 그.
10년 뒤의 일을 결정하고,
자신이 선택한, 혹은 선택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감정을 미리 갖는 사람들.
한마디 한마디 영화 속 대사 같은 그의 말을 들으며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나는 영향력을 만들어 내고 싶어.
500년이 지나서도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기를 바라.
자신만의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조언하던 그는
삶의 이유 앞에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모습이 더욱 영화처럼 느껴진다.
"슈리다르,
당신의 말은 영화를 보는 기분이에요."
그는 새침하게 윙크하며 답한다.
"그야 나는 영화인이니까.”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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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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