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만난 루반
거리 곳곳을 지키는 낡은 아파트와 낡은 건물의 벽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
덤덤한 여유를 품고 있는 낡은 거리를 거닌다.
공산권의 몰락이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동구권 유럽 거리는
미디어로 채워지지 않은 불가리아의 이미지를 색칠한다.
서울공화국에서 집중된 인구분포에 살을 부대끼며 지하철에 오르며 살아온 지난 삶은
대도시임에도 적은 인구수에 한적한 거리가 펼쳐지는 수도 소피아가 마냥 신기하다.
지나가는 행인에게서도 무언가 담담한 여유가 느껴진다.
아침 일찍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넘어가는 버스에 오르고자 정류장으로 향한다.
조용한 소피아의 아침은 우울한 느낌마저 느껴진다.
그 우울감이 나쁘지 않아 조용히 음미한다.
로파이 노래가 주는 느림의 미학과 함께 소피아 거리를 바라본다.
유럽 대륙 여정의 시작인 불가리아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추억은 불가리아의 이미지를 가득 만들어
불가리아를 향했던 의문을 해소한다.
잔잔한 우울감으로 점철된 거리와 작별 인사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구글이 알려준 지도에 내렸지만, 무언가 휑하다.
본능적으로 급습한 불안한 감정과 달리
조금 걸으니, 버스정류장이 보였고, 출발시간까지 20분이 남는 걸 확인하고 안도한다.
숨을 잠시 고르고 버스 승강장을 찾는데,
아무리 봐도 예매한 버스 승강장이 없다.
다급하게 아무 사무실에 들어가 '베오그라드'표를 외친다.
방방 뛰며 정류장 곳곳을 다니며
앉아 있는 승객, 다른 직원에게 묻고 물어
같은 버스에 오르는 사람을 찾아보지만,
누구도 나와 같은 버스를 기다리지 않는다.
버스 출발 시간인 7시 30분을 가리키는 초침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데
애석하게도 앱은 버스가 출발했다는 문구로 바뀐다.
시간을 놓쳐 늦게 온 거면 몰라도
미리 와있어 승강장을 찾았음에도 타지 못한 사실은
30유로 버스표를 그냥 날렸다는 허망함과 더해져
하루아침에 기분을 망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승강장 곳곳을 터덜터덜 돌아다니는데
저 멀리 한 남성이 내게 묻는다.
"혹시 너도 니스 가는 버스야?"
그의 이름은 루반(Ruban).
서로가 '방금 떠난 그 버스'를 놓친 동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루빈은 7시부터 정류장에 와있었지만, 버스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우린 버스를 탈 수 있는 해결 방안을 함께 고민한다.
시간과 돈을 날렸다는 생각에 짜증 나 있던 마음은
루반을 만나는 순간 즐거움으로 바뀐다.
혹시 모르니 30분 정도인 거 기다려보자는 제안에
승강장에 앉아 우린 이야기 나눈다.
루반은 인도 남부 캐롤라 사람으로 영국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유럽 여행을 하는 중 불가리아에서 북마케도니아로 향하는 중에 버스를 놓친 것이다.
"루반, 방금까지 나는 엄청 화가 나 있었어.
아마, 너 없이 혼자서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면 짜증 나고 답답했을 거야.
그런데, 너를 만나고,
버스를 놓친 이 순간도,
해결 방안을 고민하는 순간도,
즐거움으로 바뀌었어.
함께해서 그런가 봐."
동병상련 심정으로 위로받은 우리는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버스 앞에서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니스행 버스에서 갈아타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타야 했던 나는
니스행 버스로 다음 버스를 취소해야 하나,
지금 출발하는 니스행 버스는 없으나,
놓친 버스는 환불을 어떻게 받아야 하나,
이것저것 고민을 하는 나에게 루빈은 말한다.
"나중에 환불받으면 되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골똘히 고민하는 나는
그의 간단명료한 말에 깨달음을 얻는다.
문제 상황을 복잡하게 풀어내려는 수학자 앞에
덧셈과 뺄셈으로만 이루어진 간단한 해답을 가져온 느낌이다.
북마케도니아행 버스가 있어 다음 버스를 예매하고 돌아온 루반에게 묻는다.
"베오그라드행 버스가 오후 4시에 있는데, 그럼 새벽 12시에 도착해.
물론 가능은 하겠다만, 이후에 베오그라드 호스트 집에 찾아가면
늦게 가니 민폐를 주게 되고, 나는 거기 교통도 모르고 ···.
9시에 있는 버스는 이미 만석이고,
남는 좌석이나 타지 않는 승객이 생길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
평소 불확실한 미래를 즐기고, 좋아하지만
계획된 사실이 틀어져 생긴 불확실성 앞에선 한없이 인색한 나는
틀어진 사실로 인한 각종 사실을 끌어 들어 얽히섥히 복잡하게 생각한다.
이것저것 이름을 붙여가며 스스로 머리를 옭아매는 나에게 루반은 말한다.
"데이지, 간단해.
9시 버스 기사에게 물어봐서 좌석이 없으면 다음 계획을 짜면 되고,
좌석이 있으면 타는 거야."
그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띵해진다.
"그렇네!"
생각해 보면 참, 모든 건 간단하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
생각한 방법이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
계획이 틀어진 사실에 매몰된 감정으로
비용과 시간을 아까워하는 나는
눈앞의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주위만을 뱅뱅 돌고 있었다.
황당하여있는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루반은 말한다.
"자, 문제 해결은 된 거 같으니,
달콤한 걸 채울 시간이다!"
승강장 옆 슈퍼마켓에서 빵과 핫초코를 사 온 우리는
놓친 버스가 가져다준 인연을 마음껏 즐긴다.
오지 않는 버스를 향한 갈 곳 잃은 눈동자는
서로를 향한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바뀐다.
루반은 전 세계를 여행하는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나는 루반이 지내온 삶에 관심을 보인다.
"우와! 나의 첫 한국인 친구야!
내 친구들에게 한국인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면 좋아할 거야."
톡톡 튀는 매력으로 대화의 활기를 더하는 루반은
인도에서 엔지니어 학위로 학창 시절을 보내왔다.
외국 대학원 진학을 알아보던 중
운 좋게 석사 비자와 함께 직장을 구하게 되어 폴란드에서 지내다
소프트 엔지니어가 되어 영국으로 넘어왔다.
인도인 중 타밀 사람을 대상으로 여행 크리에이터 활동을 펼치는 그는
여행을 좋아해 28개국을 여행하고 있다며 자신의 여행기를 들려준다.
"여행하면서 엔지니어를 많이 만났어.
모든 엔지니어는 여행하면서 동시에 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거 같아.
참 여행하기에 좋은 직업인가 싶어."
"사실 그렇지만은 않아.
나는 여행할 때보다 일할 때 오히려 쉬는 느낌이 들거든.
아침 9시 일을 하는데, 8시 59분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돼 (웃음)"
조금씩 쌀쌀해지는 불가리아 날씨에 핫초코는 우리를 사르르 녹게 한다.
핫초코의 달콤함과 빵의 바삭함은
동네 슈퍼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우리의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달콤한 핫초코를 홀짝 마신 뒤 내려놓는다.
생기 넘치는 루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인생은 참 재밌다.
여행은 참 신난다.
알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경험, 새로운 인연이 쌓인다.
나는 이 순간이 참 좋다.
퍼뜩 들어온 생각은 주체할 수 없어 입 밖으로 튀어나와
흥분하며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말하는 그에게 말한다
"루빈, 오늘 아침에 버스를 놓쳐서 정말 행운이야.
덕분에 너를 만나고,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 좋은 추억이 생겼잖아.
비용과 시간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네 덕에 모든 게 상쇄되는 기분이야."
9시가 되어 베오그라드행 버스를 찾아간다.
만석인 버스이기에 이미 승객으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기사에게 남는 좌석을 묻는다.
"루반!! 맨 앞자리 비는 좌석에 앉으라고 하네!!"
나를 위해 정류장 곳곳을 뛰며 ATM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루반에게 웃으며 말한다.
"와!! 다행이다 데이지!
만나서 즐거웠어. 다음에 또 보자!"
바로 출발하는 버스에 정신없이 앉은 뒤,
버스 창가 너머로 인사한다.
직접 발로 뛰면서 버스를 봐주고,
틀어진 계획의 공백을 즐거운 대화로 채워준 루빈.
그와 이별하며 버스에 오른다.
버스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방금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따뜻한 핫초코를 움켜쥐며 루반에게
삶의 이유를 묻던 순간.
내 삶의 이유는 탐험이야.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탐험
사람들과 문화를 알아가기 위한 탐험,
입이 벌어지는 자연의 마법을 목격하는 탐험
이런 탐험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야.
그에게서 배운 삶의 자세는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버스 내내 내게 울림을 준다.
틀어진 계획에도 생각을 비우며 간단하게 마주하는 자세.
'만약 한다면··'이라며 머리를 쥐어짜기보다
'일단 해보자' 라며 단순하게 생각하는 자세.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 자세는 문제를 곧바로 풀리게 하며
커다랗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순간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가벼워진 마음은 말한다.
"그럼, 달콤한 핫초코나 마시러 가볼까?"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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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