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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불가리아 드라거노브트시에서 만난 아니카

by 여행가 데이지


세계일주를 중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머물면서

조금의 불안과

많은 설렘이 어우러져

떨림을 만든다.


떨림의 도구는

나에게 용기를 준다.

여행길을 딛는 용기,

나아가게 하는 힘을 만든다.


이 여정 위에 미소를 짓게 한다.








▶ 유기견 보호소 봉사를 함께했던 친구, 콘스테인과의 이야기



콘스테인이 떠난 뒤,

독일에서 왔다는 새로운 봉사자가 등장한다.


말수가 적은 그는 본인을 아니카라고 소개한다.

언제나 부드럽게 웃던 콘스테인과 달리

아니카는 시크하게 "yep"하고 대답하곤 한다.

사뭇 달라진 봉사의 분위기가 이어진다.



봉사를 오가는 차 안에서,

잠시 보호소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시크한 아니카와의 정적을 채우기 위해

눈알을 굴리며 말할 거리를 떠올린다.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아니카 너는 추운 날씨 좋아해?"


"응 좋아해."


"..."


"오늘 봉사하면서 어떤 일이 있었어?

아이들은 어땠어?"


"별일 없었어. 아이들은 귀엽더라."



"..."


"참, 오늘 잠자리는 괜찮았어?"



"응"



"...."


어떤 질문을 해도 "Yep"하고 짧게 대답하는 아니카.

그와의 불편하던 정적은

봉사 날이 쌓이면서 점차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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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책을 나가는 중에


하루는 신나게 뛰어노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나는 말한다.


"강아지들이 뛰어노는 걸 보면,

아이들이 참 행복해 보여.

유기견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전혀 유기견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 같아.


전혀,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거 같지도 않아.

산책하러 가며 해맑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아니카는 언제나처럼 짧고 굵게 답한다.



"강아지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의 짧고 간결한 대답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는다.

동시에 한국에서 보아온 유기견 보호소를 떠올린다.



사진: Unsplash의 Sasha Sashina

좁은 공간에

철창으로 이루어진 문

생활 반경이라곤 고작 벽과 벽 간격뿐.

거기서 아이들이 할 일은 그저 멍 때리며 다음 밥시간을 기다리는 거였다.

안전을 위해 설치된 울타리이지만,

강아지들은 울타리로 인해 더 큰 무언가를 잃고 있었다.

그건 살아있다는 감정이었다.


그에 반해


이곳 보호소 아이들은

아침이 되면 보호소 옆의 들판을 하염없이 뛰어다닌다.

저녁이 되기 전, 매번 가는 산책 코스에 들려 강물에 몸을 적신다.

누구보다 해맑고

사람에게 안기며

친구들을 물고 장난치는 아이들.

울타리는 보호소의 질서를 위해,

보호소 강아지를 안전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강아지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강아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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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며 행복해하는 멍멍이들

강아지로 태어나

강아지의 삶을 사는 아이들.

그들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면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기견 보호소라면

언제나 답답하고,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버려진 강아지들의 정류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보호소에서 강아지들은

강아지의 삶을 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며,

드넓은 들판을 뛰어다니며 강아지로서 하고 싶은 모든 행동을 다 할 수 있었다.


아니카의 말을 곱씹으며 말한다.


"강아지들은

강아지의 삶을 살고 있었어."






드르릉


드르릉



여느 때와 같이 빨간 승용차를 타고 출근을 하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배터리 문제인 거 같아.

걸어갈까?"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도 덤덤하게 맞이하는 아니카.

아침 새벽 공기를 맞으며

불가리아의 시골 마을 길을 아니카와 함께 걷는다.

살랑거리며 아침인사하는 나뭇잎,

짹짹거리며 기지개 켜는 아침새,

그리고,

안온한 보호소로 향하는 우리.


길어진 출근시간을 빌려 그와 짧게 이야기 나눈다.


IMG_7782.jpg?type=w966 새끼 강아지를 돌보는 아니카의 모습




아니카는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마케팅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석사학위를 기다리고 있다.


23살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덤덤하고

묵묵히 책임을 짊어지는 그의 모습은

성숙함이라는 삶의 지혜로 가미되어 다가온다.



가는 길에 한 농부가 도로에 누워있다.

아니카는 덤덤하게 말한다.


"흠. 그렇군."


이내 그냥 농부를 지나치는 아키나.

별거 아닌 순간이지만, 찰나의 순간에 느낀 그의 반응은

내게 많은 걸 알려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순간.


그가 대하는 삶의 자세에 감동한다.



IMG_7941.jpg?type=w966 봉사하는 아니카의 모습



아니카는 휴식 시간에도 보호소 봉사를 한다.


잠시 쉬면서 여행계획을 짜는 나를 뒤로

아니카는 새로운 아기 강아지 집 청소를 하곤 했다.

괜히 내 일을 신경 쓰느라 바쁜 나는 미안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덤덤히 자신 몫을 해내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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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기간을 보내는 내내

그는 간결하고 명료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의 덤덤한 자세를 통해

묵묵히 해나가는 법을 배운다.


나아가 그는 알려준다

배려하는 모습, 욕심이 없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를.



단순히 봉사에 국한되지 않고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알려주는 아니카.

덕분에 봉사는 더욱 소중하고 아담한 시간으로 가득해진다.


쿨쿨

어느덧 일주일이 빠르게 흐른다.


닐과 클레어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뒤,

숙소로 돌아와 아니카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가진다.


특별한 날을 맞이하는 듯 마을 주민들은 파티를 준비한다.


숙소 창가 너머로 보이는 7명 남짓의 주민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밤을 즐긴다.



짧게 이어지던 대화는 제대로 차려진 저녁 식사를 계기로 오랫동안 이어진다.




나는 그에게 이전부터 생각해 온 질문에 대해 토로한다.


"여행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깨닫고 있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지.

여행 이후에 돌아가면 취업하고, 결혼하고, 가족을 꾸리는 ··

사회가, 남들이 만든 클래식 방법의 삶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게 그런 방향일까? 고민하고 있어."



"삶은 그저 발생하는 거야.

아이를 갖게 되면, 돈이 너에게서 정말 중요한 책임이 되는 거지.

단지 너는 선택하게 되는 거야.

그냥 이 안전한 게임을 시작하는 거지.


사무실에 가서 매달 같은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이거나,

혹은 프리랜서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거나,..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가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기도 해.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야. "



삶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나에게

그는 말한다.


"너를 편하게 만드는 그 느낌, 분위기를 믿어.

예를 들어 히치하이킹을 한다고 하면, 네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하지 않고,

네가 안전하다는 운전자라고 생각하면 하는 거지.


내가 어떤 상황에서 혼란스럽거나,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는 하지 않아.

자동적으로 느끼는 옳은 결정 있잖아. 그걸 믿는 거야.


Feel yourself."



간단하고 명료하게 답하던 아니카.

그는 어떤 화두를 던지면

화두의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한 문장씩 단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배운다.


주민들이 틀어놓은 발칸반도풍 노래를 듣는다.


마당에 모인 주민들은 여전히 큰 음향으로 발칸반도 노래에 흥겹게 몸을 맡긴다.

발칸반도 노래는 우리의 정적을 채운다.

그 사이로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나의 느낌을 믿고,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거야.

내 삶의 이유이지.





"물론 타인과 관계를 갖게 되면

상대방에게 영향을 받겠지.


그렇지만 내 삶의 이유는

내가 절대 다른 이들을 위해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야.

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믿고, 너 스스로를 잃지 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했어.

지금껏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왔지.

모두 다른 배경과 다른 환경이지만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하더라고."



아니카는 으레 짧고 강렬하게 대답한다.



"우린 모두 인간이니까."






IMG_7291.jpg?type=w966 조금 끽 지고 있는 노을




침대 옆에서 자고 있는 아니카를 바라본다.

그를 향한 시선은, 그에 대한 감사함으로 뒤덮인다.


아니카가 보여준 덤덤함,

아니카가 알려준 정적은

내게 '무해함'을 알려준다.


내게 무해한 사람.

동시에 무해하다는 것의 영향을 알려준다.


'나도 그런 멋진 무해한 사람이 되어야지.'



유기견 보호소 봉사 마지막 날


유기견보호소 봉사를 시작한 뒤,



어느덧 마지막 밤을 맞이한다.



비건 피자를 먹은 것도,

비건 소시지를 먹은 것도,

내가 지금 이 사람들과 이런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이 사실이 좋다.



마지막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봉사하면서 들었던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떠올린다.

강아지 공장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

중학교 진로발표 시간에 '동물보호사'가 될 거라고 나 자신을 소개했던 순간.



그때에서부터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

무슨 차이로 나는 더 이상 동물권리에 이전과 같은 관심을 갖지 않는 걸까.


그리고 웃음 짓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걸.

흔하게 관심사가 바뀌어가고

내가 몸 담그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도 달라지기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는 분야도 달라지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으로

동물권 분야에 일하지 않더라도,

난 동물권을 외치는 이들의 생활양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일 아침 보호소를 떠나기 전,

강아지들에게 남은 내 사랑을 듬뿍 줄 생각을 하며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눈을 감는다.



그렇게 특별하다 믿었던 자신이
평범은커녕 아예 무능력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이성으로부터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분신인 듯 잘 맞던 친구로부터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고
소름 돋던 노래가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고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저 짝사랑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삶에 대한 욕망이나 야망 따위가
시들어 버리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삶이 치명적일 정도로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순간 또한 있다
우리는 여태껏 느꼈던
평생 간직하고 싶던 그 감정은 무시한 채
영원할 것 같이 아름답고 순수하던 감정이 다 타버려
날아가는 순간에만 매달려 절망에 빠지곤 한다
순간은 지나가도록 약속되어 있고
지나간 모든 것은 잊히게 마련이다
어차피 잊힐 모든 만사를 얹고
왜 굳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며 사냐는 게 아니다
어차피 잊힐 테니, 절망하지 말라는 거다
겁내지 마라.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죽지 마라.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조급해하지 마라. 멈추기엔 너무 이르다
울지 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은 삶이 버거운 너에게, 무라카미 하루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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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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