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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Aug 20. 2023

하늘의 층고

바리케이드와 와인바 01_2022년 2월

1.

스무살 가을 무렵부터 나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특히 밤하늘의 달을 보는 게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뉘이다가도, 달 보는 걸 잊었음을 깨닫고는 그대로 기숙사를 박차고 나서기 일쑤였다. 꼭 환하게 커다란 보름달이 아니더라도, 한구석이 일그러진 이름없는 달이어도 좋았다. 조용한 밤하늘 우거진 나무숲 위에, 혹은 새하얀 가로등 위에 고고하고 밝게 떠 있는 달. 달무리도, 흔들림도 없이 땅과 그 사이의 무한한 공백을 올곧이 견디며 높-이 떠 있는 달을 보고 있노라면 꼭 새까맣게 드넓은 우주와 비밀을 공유하는 것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그렇게 매일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또 하나 습관이 생겼는데, 하늘의 층고를 재는 것. 내 마음의 넓이에 따라 하늘의 층고가 다르게 느껴지고, 그 날 그 날의 낭만에 따라 하늘의 층고가 자아내는 분위기도 달라졌다.


요즈음은 사실, 하늘이 풀썩 내려앉아 있던 날들이 많았다. 이제 막 대학교 막학기를 끝내고, 취업 준비를 앞둔 채 체험형 인턴으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예상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인턴이 맡는 부수적인 업무들에 대한 갑갑함과,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점수 매기는 서류들을 준비하면서 잔뜩 움츠러드는 마음과, 갈매나무와 영웅을 꿈꾸다가 이제 매일 계산기와 모니터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바뀐 일상, 내가 오롯이 쓸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서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구분하며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 이런 이유들로 최근 일상의 풍경이, 내 하늘의 층고가 많이 달라졌다.


2.

7월 말, 인턴을 시작한 지 3-4주가 되어가는 어느 비 오는 퇴근길, 차들이 빼곡한 서울의 도로 위 버스 창가자리에 앉아 여느 때처럼 밴드사운드가 귓가를 울리는 노래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가 딱 낭만적일 정도로 적당히 내려서 그런지, 도로가 더 밀려서 마침 노을이 딱 예쁘게 질 때 한강을 지나서 그런지, 그날은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언덕 위 조그맣게 보이는 남산타워 뒤로 지고 있는 노을의 위치가 어제와 달라진 게 생경하게 느껴졌고, 조용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꼭 드럼 박자에 맞추어 떨어지는 것 같아 풍경이 재미있어졌다. 그러면서 문득, 아주 오랜만에, 벌써 오랜 옛날처럼 멀게 느껴지는 호주의 하늘 생각이 났다. 멜번의 하늘은 참 층고가 높았었는데.


3.

내가 2022년을 전부 호주 남쪽의 도시 멜번에서 보내게 된 건, 내 의지보다는 우연의 연속 때문, 아니 덕분이었다.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았던 2019년 초봄부터 나는 꼭 3학년 때 미국 브로드웨이 한복판으로 교환학생을 신청해야지 다짐했었다. 한 손엔 스타벅스 커피, 다른 손에는 뮤지컬 티켓을 들고 당당한 보폭으로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며 대도시를 즐기겠다는 부푼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 즈음 예상치 못한 번아웃을 겪고 계획을 완전히 틀었다. 뉴질랜드 대자연 속에서 푹 쉬고 오기로. 그런데,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었고, 뉴질랜드가 유학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나는 급하게, 다행히도 영어권인 옆나라 호주의 아무 도시를 골라 교환학생에 지원했고, 대도시 속 뮤지컬 감상이나 자연 속 휴식 같은 명확한 하나의 목표를 잡을 새도 없이 멜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멜번에 내려서 야라강변 잔디에 누워 우거진 이파리들 사이로 햇빛을 바라봤을 때부터, 내가 이 따스하고 상냥한 도시에 온 게 마땅히 그래야 하는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 햇빛이 자리하고 있던 호주 하늘은 정말이지 한없이 높아서 숨이 펑 트이는 기분이었다.


4.

이후 호주에서 보낸 1년을 개괄하자면, 호주에 처음 도착한 2월은 처음 맛보는 해방감과 여유를 즐기며 빠르게 흘러갔고, 호주에서만의 교환학기 목표도 생겼다.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 최대한 많이 사귀기, 최대한 많이 최대한 다양하게 경험하기. 4월부터는 그렇게 만난 호주 친구들과의 여행을 위한 파트타임 일을 시작했고, 6월엔 내가 남다르게 고른 교양 수업들(댄스, 합창, 극장 조명, 스트릿 아트)의 종강 공연들을 무사히 마치며 학기가 끝났다. 그즈음 나는 호주에 더 남고 싶어졌고, 7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살이를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 예상치 못한 나홀로 뉴질랜드 여행을 시작했다. 8월, 무사히 호주로 돌아온 나는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큰 폭의 감정 변화와, 수많은 고민과,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5번의 이직을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12월, 50일 간 나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마음껏 내가 되고 싶었던 내 모습으로 있으며 질주하듯 보낸 1년이었다.


5-1.

2022년 2월 15일 메모


서해 출신에, 바다 여행을 꽤나 자주 다녔었지만, 지구 반대편 호주의 도시에서 본 바다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시점부터 틈날 때마다 걷고, 보고, 기록하며 꿈틀거리는 호기심과 동력을 갖게 된 것 같다. 원래 비 오는 날의 산책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멜번에서는 부러 우산을 들고 비 웅덩이를 첨벙첨벙 걸으며 비를 좋아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나더러 길거리 땅바닥에서도 에너지를 얻는 바깥순이라고 했다. 공간이 달라질 때 새로워지는 조명과 소품,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옷차림, 타일의 무늬, 도로의 색깔, 모든 것들이 좋고, 보다 다양한 세상의 조각들을 수집하는 기분이 든다. 길가에 나섰을 때 마주한 흐트러진 보도블록 하나에서도 어떤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고, 그 이야기들을 모으고 모아서 펼쳐보이고 싶다.


5-2.

2022년 2월 21일 메모


내가 마음이 넘치게 풍요로웠을 때엔, 하늘의 층고가 낮은 게, 가라앉은 하늘의 무게를 버텨내야 하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하늘빛이 바닥 밑까지 파고드는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비 내리던 퇴근길의 버스 안에서도, 여느 때처럼 마음이 무겁고 하늘이 낮았지만, 보슬비 덕에 더 낭만적이었던 노을빛이 버스 근처까지 물들어서 산뜻해졌는지도 모른다.


6.

벌써 호주에 다녀온 지 6개월이 지났다. 나를 무한히 성장시킨 호주에서의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면서 세상과 삶을 사랑하는 나를 되찾은 것 같았다. 출근길의 풍경도 달라져서, 환승역에서 각기 다른 모양의 이어폰을 꽂고 각기 다른 고민이 담긴 무표정으로 계단을 쉴틈없이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하늘이 잔뜩 내려앉아 있는 듯한 사람들의 등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주에서 내가 열심히 수집해둔 다양한 일상의 조각들과 생각들을, 당시 남겨둔 메모들에 지금의 감상을 덧붙여 적어보기로 했다.


오늘도 나는 계산기와 모니터 바깥에서 조금 무겁고 낮게 떠 있는 예쁜 하늘을 들여다보며, 그저 버텨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내 하루하루를 힘껏 아껴주기로 한다. 나는 여전히, 세상에 쓸모없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그 마음 그대로 가볍고 심심하게, 내 멜번살이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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