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이 주렁주렁 달린 논문형식의 글을 상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다. 옛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어 가볍고 쉬이 읽힌다. 투박하고 원형적인 옛 이야기 속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와 진리를 더듬어 찾아내본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옹고집전>의 원형 설화 <집 나간 아들과 가짜 아들>과 <꾀쟁이 하인>이다. 먼저 <집 나간 아들과 가짜 아들>은 기본적으로 진짜와 가짜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그 둘은 동일인물이었다, 라는 해석이다. 가짜의 삶 또한 포용하는 결말이 그 주장을 뒷받침하며 더 나아가 진짜를 되찾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아내와 암행어사 또한 타자가 아닌 양심이나 의지 같은 본인의 내면 요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사학에서 심리학으로 넘어가는 흥미로운 순간이다.
<꾀쟁이 하인>은 당시의 신분체제를 전복하는 과감한 상상력의 이야기로 희극을 표방하지만, 마냥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다. 양반과 하인이 길 위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펼치는 대결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양반을 보여줌으로써 신분이라는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에 폭로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하인, 단순히 신분제를 뒤집어엎는 민중적 영웅에서 멈추지 않는다. 힘없는 양민도 속여먹고 대놓고 사기를 치는 이 캐릭터는 단순히 신분제만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세계전복적 인물이다. 세상에 반역하고 홀로 투쟁하여 존재를 드러내는 트릭스터에게 평화와 윤리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다.
옛 이야기를 단순히 해학적인 이야기로만 이해했던 내게 이런 깊숙한 해석은 좀 신선했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고 그것은 후대의 독자 혹은 청자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준다. 사람은 떠나지만 좋은 이야기는 오래오래 남아 전해지는 법. 그것이 옛 이야기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