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보호본능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거나 덧칠해질 가능성이 있다, 무조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줄리언 반스의 이 작품은 이러한 자기기만에 가까운 인간의 기억을 소재로 한다.
주인공 토니 웹스터는 깨나 반짝이는 청년이었다. 앨릭스와 콜린이라는 친구와 패거리를 이루며 철학과 문학, 역사에 심취한 허세 높은 이 청춘들에게 에이드리언이라는 진중한 청년이 합류한다. 대학 진학 후 그들은 흩어지지만 우정은 영원할 것을 약속한다.
이후 토니에게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가 생겼고, 그녀를 그의 패거리에게 소개한다. 미묘한 계급차와 자존심으로 그녀와 미성숙하게 헤어진 토니는 후에 베로니카와의 교제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분노하고 둘 모두를 그의 인생에서 지우기로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이윽고 이제 4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노년에 접어든 토니에게 어느 날 갑자기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의 유지로 약간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상속받게 된다. 응, 도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에 대한 촘촘한 이야기의 배치, 앞 선 대사들의 적절한 수거, 활용과 묘사는 이 글이 잘 쓰여진 글임을 증빙한다. 나는 반전들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읽다가 입이 떡 벌어지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특별함은 젊은 시절 허세와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평범함을 받아들이는 토니의 모습은 보편적인 인생의 모습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더 바닥이 있는 것이다. 나의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면서 동시에 패자의 자기기만인 셈. 그것은 들추어내어 진실을 볼 것인가, 착각의 상태로 행복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p.99
"우리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나의 인간됨과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 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 말로, 소리로, 사진으로-을 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엉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p.104
"젊을 때에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p.177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p.178
"내가 아는 체하며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을 때, 조 헌트 영감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는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라고 했다."p.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