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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는 이렇게 사라지나 보다

- 오늘도 J 아주머니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는 황당한 소리를 한다.

by 점빵 뿅원장 Jan 09. 2025

  J 아주머니는 우리 가족의 지인의 아내분으로 오래전부터 왔던 환자이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기에 1년에 한 번 정도 정기검진을 왔었고, 필요하면 스케일링 정도만 했던 환자였다. 작년 말 즈음이었다. 거의 1년 만에 검진을 위해 방문했을 때 다수의 충치와 치주염이 생긴 것을 확인했다. 오랫동안 본 환자이기도 하고 지인의 아내분이기에 다른 환자분들보다 더 자세히 설명을 해드렸다. 치료 기간이 길어질 것이고, 여러 번 내원해야 하며, 비용이 어느 정도나 들 것인지도 설명했다. 막상 치료를 시작하고 나니 환자분은 치료를 진행할 때마다 '나는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설명이 부족한 것인지, 환자분의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위생사들이 어떤 친구들인가. 원장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올 때마다 친절하게 다시 설명하고, 또 설명해 주었다. 

  

  J아주머니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해다기보다는 점점 더 무례해지고 있었다. 우리 직원들을 하대하는 것이 점점 눈에 보였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환자분들이 치과에 오면 우리 위생사들에게 "선생님" 또는 "간호사님"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반해 이 분은 "아가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지방이고, 옛날 분이니까(라고 하기에는 50대 초반이다. 나랑 몇 살 차이 안 난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 사람이 정말 무례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날이었다. 날씨가 춥기도 했고, 아직 히터의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지 않았던 아침이었다. 우리 치과는 환자분이 추울 때나 치마를 입은 여자분들을 위해 무릎 담요를 준비해 둔다. 이 날 첫 환자로 J 아주머니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고, 앉자마자 "아가씨!"를 외치면서 자기 무릎을 탁탁 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서 우리가 쳐다보니 다시 한번 무릎을 두드리면서 "아가씨, 담요!"를 외치는 것이었다. 한 마디 해야 했지만 모두가 너무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환자분이 들어온지라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계속 치료가 진행되어 몇 개의 치아에 크라운을 했고, 신경치료를 끝낸 또 다른 치아의 크라운 치료를 한 날이었다. 본을 뜨고, 임시치아를 만들고 나서 그날의 진료가 끝났다. 환자분이 수납을 하러 데스크에 앉았고, 직원이 그날 한 치료의 내용을 설명하고 보험진료 비용이 얼마이고, 비보험 진료비용이 얼마인지 설명했더니 "나는 이미 돈을 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직원이 "저희 치과는 선납을 받지 않고, 그날그날 치료한 것에 따라서 비용을 받습니다"라고 설명을 했더니 돌아온 답은 "그러면 그동안 낸 돈은 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치료한 다른 치아의 치료비용임을 설명하자 환자의 답은 "그럴 리가 없다. 아가씨가 잘 몰라서 그런 거다."라는 말을 했다. 수납을 받던 직원은 황당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을 했다. 하지만 J 아주머니는 그러면 "그동안 수납한 내역을 다 출력해 달라"라고 했다. 직원은 출력을 해서 치료했던 치아와 그때의 비용을 매칭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드렸다. (참고로 말하지만, 지인의 아내분이기에 내가 비보험에서 일부 할인도 해 드렸다. 비용에 관한 설명은 치료 시작 첫날부터 했었고, 환자분이 내원하실 때마다 매번 그날 진료분에 대해 안내했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그건 내가 이 내역서를 가져가서 카드사에 전화해서 명세서를 받아 진짜 그렇게 결제한 게 맞는지 확인하겠다"였다. (물론 아무 이상이 없었다.)

  직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화를 넘어서 분노가 치솟았다. '내가 치료하지도 않고 돈을 받고 있다는 생각인 건가? 본인에게 바가지라도 씌우고 있다는 건가? 할인까지 해줬는데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려고 누워도 J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생각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잠깐 깨었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과 화 때문에 아침까지 뜬 눈으로 새는 날도 있었다. 예약표에 쓰여 있는 이 환자 이름을 볼 때마다 '이 날 오면 꼭 한 마디 해주어야지.',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가까운 가족의 지인이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말하기로 결심했던 날, 헤드 위생사에게 말했다. 다음번 진료 때 J 아주머니 진료 끝나고 나면 상담실로 모셔달라고. 내가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 마디 해야겠다고. 그러자 착한 헤드 위생사가 말했다. "원장님, 그냥 한 번만 참으세요. 원래 그런 분이니까요. 진료도 거의 끝나가고, 가족분과의 관계도 있잖아요. 원장님만 괜찮으시면 저희는 괜찮아요."라는 말에 진작부터 이 환자를 차단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황당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를 조절해 주는 직원들 덕분에 이제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이번 진료가 끝나면 한 동안은 안 봐도 된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이 환자분 덕에 마음이 불편하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 정신이 망가지는구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앞으로는 '야박하다, 지인인데 냉정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그냥 원칙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져버렸다. 인류애는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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