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당하다

1장. 실연당한 기분이었습니다 (1편)

by 니나

맑고 쌀쌀한 공기가 가을임을 알려주는 빼빼로 데이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출근 전, 나는 내 방에서 회사로부터 해고를 통보받았다. 오랜만의 통잠으로 개운했던 나는 기지개를 켜고 어슬렁거리며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우리 회사가 전 세계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사 설립 이래 처음으로 정리해고를 강행하는 날이었다. 대상자가 된 사람들은 통보 메일을 받게 된다고 알고 있었고, 많은 직원들은 두려움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그리고 내 메일함에 새 메일이 한 통 있었다.

"Unfortunately, your role has been identified as one of the roles that has been impacted…. (안타깝게도 귀하의 역할은 영향을 받았으며...)“

‘무슨 말이지?’ 일어나자마자 영어를 보니 해석이 안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의 메일이 내 손에 있었고, 곧 HR 팀으로부터 화상 미팅 요청 메일이 연이어 도착했다. 마른눈을 거세게 비볐다. 눈언저리가 눈곱에 쓸려 따갑다고 생각하며 앞 단락만 서너 번을 내리읽고 나서야 무슨 소리인지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정리해고의 대상자가 되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몇 분의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코로나 기간 호황기를 지난 회사는 코로나가 끝나자 섣부른 사업 확장으로 회사가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11,000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게 절대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떻게 이런 날 그렇게 꿀잠을 잘 수 있었을까? 나는 그날 이후 한동안 잠을 설쳤고, 날씨를 잘 인지하지 못했고, 맛을 잘 못 느꼈다. 내 몸이 앞으로 정상이 아닐 것을 예상한 어떤 기운이 마지막으로 푹 자라고 날 배려한 걸까? 잘 자고 일어나 개운한 만큼 뒤통수를 휘갈기는 충격은 그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 밥보다 잠, 넷플릭스보다 잠일 정도로 나는 하루 7~8시간은 자야 체력이 충전되는 전형적인 잠보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몇 달 동안은 3~4시간만 자도 졸리지 않았고, 새벽에도 벌떡 일어났으며,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겨울의 찬바람도 춥지 않았고, 냉정하리만치 해야 할 일을 뚝딱뚝딱 해치워냈다.


메일 내용을 점차 이해하게 되자, '오후에 판교에 있는 광고주와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어쩌지? HR과 미팅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야? 나 잘리는 거야? 내가 예전에 있던 회사는 이런 식이 아니었는데? 마이너스 통장 연장 기한이 곧 돌아오는데 어쩌나? 엄마 건강보험이 지역 보험으로 변경되겠네?' 별별 다양한 생각과 질문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었고, 나는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집중해서 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건 내 개인의 일이 아니라 업무다'라고 생각했더니 약간은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 오후 미팅에 함께 하기로 한 내 파트너와 광고주에게 금일 미팅을 일단 취소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오전 HR 미팅을 끝내고 나자, 도저히 이 공간에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노트북과 충전기, 이런저런 필수품과 커피를 준비한 뒤 마찬가지로 재택하고 있는 남자친구 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여는 순간 따뜻하고 포근한 살집 가득한 남자친구가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 폭신한 살집에 내 얼굴과 가슴이 닿으니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버티고 있던 감정의 댐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신발장에 서서 끄억끄억 소리 내며 티셔츠를 축축하게 적시도록 울어버렸다. SNS에서는 우울할 때는 따뜻한 털뭉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비록 그 털뭉치 같은 고양이나 강아지는 없지만 대신 나를 폭신하게 감싸주는 곰인형 같은 인간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했다. 늘 건강 운운하면서 다이어트를 종용하던 나였는데, 그날만은 진심으로 다이어트에 실패한 남자친구가 고마웠다.


그 이후 며칠간 있었던 일들은 시간의 순서가 약간 뒤죽박죽인 채로 짧은 사진이나 영상처럼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친한 친구에게 당장 만나자는 전화를 해서 달려가 하소연했고, 미국이나 싱가포르처럼 회사 사내망 접속 권한이 당장 없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재직증명서 같은 서류들을 받아두기도 했다. 교통사고와 같은 큰 사고 직후 주변 사람들이 괜찮은지 서로의 안부를 살피는 것처럼 메신저에서는 몇몇 친한 사람들이 괜찮은지? 살아남았는지? 무사한지? 안부를 물어보고 있었다. 링크드인에서는 이번 전 세계 정리해고로 사내망 접속이 막힌 직원들의 'Good-bye' 포스트가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지인과 친구 들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추천받은 노무사와 미팅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고 별일 아닌 것처럼 웃고 떠들다가도 남자친구만 보면 울컥하고 엉엉 울어버리는 비정상적인 감정 상태를 한동안 지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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