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데 덮친 격

1장. 실연당한 기분이었습니다 (7편)

by 니나

퇴사하기 전에 직원 혜택을 다 찾아 부지런히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우울한 건 우울한 거고, 챙겨 먹을 건 챙겨 먹어야지. 내가 빠르게 잘려버리면 아까우니 얼른 예약해야겠다.'라며 가장 빠른 시간으로 예약했다. 검사 후 얼마 안 있어 담당의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혹이 작년보다 사이즈가 더 커졌고 모양도 예쁘지 않다고 했다. 6년 전 건강검진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단어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았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당시에는 이 이야기를 엄마의 건강검진 결과로 들었었고, 이번에는 내 이야기였다. 가능하면 빨리 생검을 하는 게 좋겠다고 본원 예약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그 말에 가슴이 싸늘해졌다. 6년 전 당시에도 1~2%도 안 되는 확률일 것 같지만 검사해서 이상 없다고 이야기 듣는 것이 더 안심되지 않겠냐며, 그러니 검사해 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엄마는 생검을 진행했었다. 그리고 1~2%도 안 되는 확률에 운 나쁘게 당첨이 되었었다. 물론 지금 엄마는 힘든 수술과 치료를 이겨내고 건강해지셨다. 이번엔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점점 내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글로벌 정리해고 대상자라는 메일을 받았을 때보다 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이야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 됐든 검사 예약을 하고 병원에 방문했는데, 헐렁한 검사복으로 갈아입고 생검을 위해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아드레날린이 치솟는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초음파로 위치를 확인하고 사인펜 같은 것으로 바늘이 들어갈 곳을 체크했다. 피부 마취연고를 바르고 마취가 될 때까지 몇 분을 기다리며 혼자 어두운 간이침대에 누워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닌가. 직장에서도 쫓겨나, 몸도 안 좋아, 비극으로 치닫는 드라마 여주가 된 것처럼 훌쩍거렸다. 그러나 이내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병원 사람들에게 이런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 빠르게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고 아무렇지 않은 척 누워 기다렸다. 생검을 마치고 2주 정도 운동과 사우나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다니던 골프연습장 멤버십을 중단하고 돌아오는 길에 커다란 방수 테이프도 두 개 샀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있는 술 약속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크고 작은 모든 계획이 다 틀어졌다. 약속뿐만 아니라 내 미래도 틀어졌고 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회사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혹시라도 정말 암이라고 진단이 나온다면, 이걸 회사와 협상하는 데 더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참으로 실용적이기까지 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 사실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1주일 후, 본원에서 검사 결과를 들었다. 다행히 그 혹은 악성이 아니었고, 앞으로 반년마다 추적검사를 진행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결과를 듣기까지 길고 긴 1주일이었다. 욕실 거울에서 멍든 검사 자국을 볼 때마다 불안하지만 불안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엄마한테 이야기해야 하나 싶다가도, 아직 정리해고 대상자라는 이야기도 못 꺼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혼란스러워서 아예 입을 열지도 않았다. 나보다도 훨씬 걱정 많고 여전히 막내딸 같은 우리 엄마한테까지 지금 내 걱정과 불안을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 좋은 직장을 찾고, 검사 결과 별것 아니라는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백하고 싶었다. '엄마, 사실 엄마 딸이 좀 힘들었어'라고. 엄마 대신 옆에서 지켜본 남자친구는 건강검진 결과를 이야기했을 때부터 다 괜찮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토닥거려 줬지만, 생검결과 괜찮다는 이야기에 사실은 너무 걱정했다며 그 큰 덩치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심각한 것이 아니라 해프닝으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건강에 좀 신경 쓰자고 서로를 도닥였다.


나쁜 일은 다 몰아서 오나 보다 하며 참 절망하던 시간이었다. 제발 좀 아무것도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봐야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 다 해소되는 일이 아닌가? 아픈 것도 아니고 죽을 것도 아니었다. 건강검진에서 애매한 모양으로 발견된 그 혹이 오히려 지금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헐떡거렸는데, 사실 알고 보니 무릎밖에 오지 않는 얕은 구덩이였다고. 조금 떨어져서 내 상황을 볼 수 있게 숨 쉴 수 있는 틈을 마련해 준 것 같았다.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지금 나에게 닥친 불행을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만한 용기가 추가된 기분이 들었다.


그 시간이 조금 지나 마음이 담담해졌을 때, 엄마에게 건강검진에서 혹이 발견되었지만 악성 종양은 아니었고 추적 검사할 것이라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 회사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어서 지금 힘들지만 잘 처리하고 있고 이직할 곳도 알아보고 있다고도 했다. 내가 마음이 힘들고 혼란스러워서 엄마한테는 차마 말을 못 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엄마는 회사 이야기 안 한 것보다 검사받은 이야기 안 한 게 더 서운하고 속상하다며, 말 안 듣는 어린애 혼내듯 내 등짝을 한 대 때렸다. 감정 표현 참 잘 안 하는 경상도 아줌마인데, 등에 닿은 엄마의 손바닥에서 서운함, 속상함, 미안함, 안도감,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온전히 느껴졌다. 가수 요조가 부른 <보는 사람>이라는 곡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내 등에도 날개가 있는데

엄마한테 등짝을 너무 맞아서 그래

불쌍한 것을 알아본다고 해서

착한 사람은 아냐
나는 그냥 보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냥 보기만해요’

그날 내 등에도 날개가 있었다면 몇 센티미터는 더 길어졌을거다. 그러나 그 노래와는 조금 다르게 그저 보고 있지만은 않으려고 한다. 얼마나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만큼 한 발자국 내딛어 나를 위한 틈을 만들려고 한다.


한편으론 나이 마흔 넘어서 등짝을 맞으며 혼난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를 걱정시키고 서운하게 만들었다는 마음에 미안함은 컸지만, 나는 엄마에게 여전히 아이 같은 자식이구나 싶어, 어릴 때로 잠시 돌아간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더 어리광 부리고 더 혼나고 싶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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