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실연당한 기분이었습니다 (6편)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라는 곳을 찾아갔다. 주니어 시절 회사가 주는 압박감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못 잘 때에도 가지 않았던 곳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가족이 슬픔과 상실감을 가슴에 품고 서로에게 해가 될 정도로 날이 서 있을 때도 가지 않았던 곳이다. 남자친구의 우울감이 커지고 커져 나까지 잡아먹을 것 같아 두려웠을 때도 가지 않고 버텼던 곳이다. 나는 자신을 긍정적이고 밝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되뇌고 있었으며, 그런 곳에 가는 것은 나의 강점을 내가 스스로 무너뜨리고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나를 걱정하는 다정한 A님의 이야기에 마음을 바꾸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아닐 수 있다고, 좋은 교수님이라며 가서 상담 한번 받아보라고 추천하셨다. 게다가 정리해고에 대응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한데, 회사의 부당한 조치로 인해 정신적인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서류로 남겨놔도 나쁠 것 없다는 조언이었다. 힘들었던 본인의 기억을 굳이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내 소식을 듣더니 과거에 힘들었던 경험과 함께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참 따뜻한 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리하여 만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은 한눈에 봐도 푸근한 인상이었다. 몸집이 푸근하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 작은 듯하지만 반달같이 웃고 있는 눈이 예쁜 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를 반겨주듯 오~ 하는 소리와 미소를 보여주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주로 대하는 직업이어서 늘 미소로 사람을 대하는지, 온화함은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배어 있었고, 그게 처음 만나는 내가 긴장한 마음을 스르륵 놓게 했다.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통보받는 것, 이런 건 지금까지 잘 지내오던 남자친구에게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는 것과 같아요. 도대체 왜 헤어지자고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되고.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죠?
"글쎄요…."
"복수해야죠! 제일 큰 복수는 내가 다른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서 잘 사귀는 거예요. 그러니 집에 가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새로운 회사를 찾는 일을 하세요. 그걸 루틴으로 만드세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좀 쉬고 싶어요. 저는 지친 것 같거든요.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보다 먼저 회사를 그만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한테 이야기하니까 저보고 좀 쉬래요. 쉬다 보면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다고 그랬거든요."
"그 친구는 로란님처럼 회사가 퇴사하게 했나요?"
"... 아니요. 본인 의지로 퇴사했어요."
"그러니까, 로란님은 쉬지 마세요. 내가 원해서 내가 정해서 퇴사하는 게 아니면 지금은 안 쉬는 게 나아요."
"그렇지만…."
"지금 로란님이 쉬면, 왜 나지? 왜 우린 헤어졌지? 그 질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요. 아니 오히려 더 커질 거예요. 그 왜가 더 커져서 잡아먹힐 거예요."
"아…. 네"
"다음 직장을 찾는 일을 먼저 만드세요. 기분 상관없이 그냥 해요. 그냥 해야 하는 일이라서 하다 보면 감정이 따라갈 거예요. 나아질 거예요. 내 말을 믿어요."
나는 지쳤고 쉬고 싶었다. 글로벌 회사 특유의 몰아세움에 지쳤고, 이번 정리해고에 정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당분간은 쉬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이야기에 내 생각은 쑥 들어가고 말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설득당했다. 이십 분 넘게 하소연도 하고 울컥해서 눈물도 그렁그렁 맺혔다가 선생님의 단호한 설명에 설득당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던가? 쉬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러다 남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가족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으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누군가 특히 전문가가 나에게 단호하게 조언을 해주니, 그게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 없었다. 살아오며 크고 작은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할 때마다, 누가 좀 대신 결정해 주면 안 되냐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오늘이 정말 그런 날이었다.
집에 와서 우선 오래된 이력서를 꺼내서 최근의 경력을 추가했다. 그 내용을 링크드인에도 업데이트하고 'open to work (이직 원함)'으로 내 상태를 변경해 두었다. 그랬더니 뭔가 좀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잡다한 것으로 엉망진창인 방을 싹 치운 것과 비슷하게 몸과 마음에 찌뿌둥한 것들이 꽤 많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아, 이게 선생님이 말씀한 것이구나. 그냥 해야 하는 일이라 하다 보면 감정이 따라간다는’ 게다가 그간 쌓였던 링크드인의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답변하고 인터뷰를 잡고 있다 보니, 회사에서 거절당한 것에서 오던 '나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를 찾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조금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명의를 만났나 보다. 이제는 선생님이 하라는 건 꼭 해야지 싶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만든 나만의 생활 규칙이 하나 생겼고, 지금까지도 그 규칙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키고 있다. '힘들 때는 해야 할 일을 만들고, 스케줄을 정하고 그냥 하기.'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기분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그런 거 없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기분은 따라가게 되었다. 운동도 귀찮고 피곤하고 힘들어도 그냥 등록하고 일정을 잡아버렸다. 그래서 그냥 해야 하니까 억지로 갔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고 몸은 상쾌하고 머릿속으로 나 스스로가 얼마나 뿌듯하고 대견한지 모른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찾아간 병원에서 만난 인연이 지금도 내 인생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병원 예약도 귀찮아서 안 하고 말았다면 지금의 나는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할까 말까 할 때는 그냥 하자. 기분이 이래서, 머릿속이 복잡해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라는 핑계는 살짝 뒤로 젖히고 그냥 하자. 많이 해보고 많이 만나보고 많이 경험해 보자. 그러다 보면 진짜 행복해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