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만큼 좋은 에너지원은 없다

1장. 실연당한 기분이었습니다 (8편)

by 니나


사람은 불확실성을 마주할 때 불편하기도, 불안하기도, 흥분되기도, 신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을 때는 자료를 찾고 추측해 가며 인과관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 내리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닥친 불확실성을 줄여나가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사건 사고의 원인을 언제나 명쾌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선명해지더라도 그 비극에 대한 분노가 쉬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억울하게 닥친 자연재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심각한 질병 등이 그런 경우일 수 있다. 나에게 글로벌 정리해고는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질병과 같은 비극이었다. 여러 가지로 고민해 보고 알아봤지만 내가 왜 선정되었는지 명확한 원인을 찾기는 힘들었다. 물론 회사가 결정한 것이니 회사를 탓할 수 있겠지만, 회사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할 뿐, 누가 어떤 과정으로 대체 왜 나를 선택하여 솎아내기로 결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니, 원인 불명의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사람이 어떤 일을 극복해 나가거나 지속해 나가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수 있다. 그중 긍정적인 에너지로는 희망, 꿈, 성취감, 욕망 같은 것들이 있다면, 부정적인 에너지로는 분노, 질투, 화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당시 나에게는 그 일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했다. 좋은 외모와 건강한 몸을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나의 외모를 비난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매일 운동하고 다이어트를 지속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와 퇴사 관련 협의를 진행하는 인사 담당자도 나를 대상자에 넣은 당사자는 아니다.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존재하지만 동시에 실체가 없는 그 누군가와 대립하고 싸우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럴 때 사람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대상자로 삼을 텐데, 나는 그게 한국 대표였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정리해고의 대상자에 추가한다면, 그 결정에 조금이라도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한국 오피스 최고 책임자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생각이 맞고 틀리고는 상관없이 그를 불편하게 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나와 회사의 협상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스타일대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괴롭히기로 했다. 정말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마음먹어야 내가 이 회사와의 지지부진한 싸움에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계속 출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싸움이라고 해봐야 바위에 계란 치기 같은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를 괴롭히는 나의 방법은 별것도 아니었다. 그냥 계속 출근해서 기존 내 업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에 계속 띄고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계속 있으면 조직을 정리하고 재편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차질이 생기겠지? 내가 자꾸 눈에 띄면 거슬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소소하게 나만의 복수를 시작했고, 이는 곧 나의 에너지원이 되었다. 그때는 연말을 앞둔 시기여서 여러 가지 사내 행사가 많았는데, 나는 남의 이목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모든 회사 행사에 기꺼이 참석해서 즐겨주었다. 그러는 가운데 거의 매일 그와 마주쳤고, 나는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가 당시 어떤 생각으로 회사를 매일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멘탈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쓸데없는 버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부는 '로란님 잘하고 있어요, 멋있어요. 파이팅'이라고도, '로란님이 필요한 데로 필요한 만큼 하세요, 저는 다 응원합니다.'라고도 말해주었다. 그가 나를 정말 불편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중요한 것은 힘든 시기를 나름의 방법으로 잘 버텨왔다는 뿌듯함이 내 속에 남았다는 것이고, 그게 자존감을 지키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회사와 후회 없이 잘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그래서 아쉬움 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



연말 행사로는 눈사람 초콜릿 만들기,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기, 프로필 사진찍기, 밴드의 연주가 곁들여진 디너파티 등이 있었다. 나는 그 행사에 모조리 참석했고, 어떤 때는 고개 들면 그와 눈 마주칠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 우연히 앉기도 했다. 디너 파티에서는 옆 옆자리에서 음식을 즐기며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은 할까?


연말 행사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은 한참 후에 공유받았다. 여러 명이 메신저로 사진을 보내주며, '로란님 사진 정말 잘 나왔어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어 직원 대부분의 사진을 봤더니 내 사진이 정말 잘 나온 것이었다.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고 밝게 웃고 있었고, 어깨를 살짝 옆으로 돌리되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러웠다. 이력서나 링크드인 혹은 마케팅 세미나 강사 소개 사진으로 써도 무방할 정도로 전문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동시에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환하게 잘 웃었데. 회사 나가기 전에 본전을 뽑는구나 아주 제대로"라며 친구와 깔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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