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사람을 위한 애틋한 마음

1장. 실연당한 기분이었습니다 (10편)

by 니나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SNS에서는 백화점 외벽을 화려하게 꾸민 레이저쇼를 찍은 영상들이 올라왔고, 각자의 집과 일터를 찍어 올린 사진에는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던 시기였다. 내가 인지하기 전부터 밥을 먹기 전에는 성호를 긋고, 주말이면 성당에 나가던 천주교 가족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보다 나는 그 시절의 색다른 분위기를 좋아했다. 차가운 겨울밤 반짝이는 전구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잔잔한 멜로디에 웅장한 합창이나 악기 연주가 따라오는 캐럴이 여기저기 들리는 게 좋았다. 추운 날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화려한 쇼핑 센터에는 잔뜩 멋을 부린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는 게 신이 났다. 뜨거운 호빵을 반으로 갈라 팥에서 나오는 하얀 김을 호호 불어 입이 데지 않게 조심스레 먹던 기억이 아릿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내가 만든 종이 저금통에 12월 한 달 내내 했던 착한 일을 기록하고, 용돈을 모아 불우이웃 돕기 같은 것에 냈었다. 아빠는 퇴근 후 똑순이 캐럴 LP를 매일 틀어주셨다.


겨울,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행복하고 즐거웠던 짧은 기억들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건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 한 그날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주제로 엄마 아빠는 말다툼했었다. 주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화가 난 아빠가 동생을 데리고 꽝 하고 문을 닫고 집을 나가버리자, 엄마는 화를 참아내느라 씩씩거리다가 이내 나를 보고는 “로란! 크리스마스트리 꾸미자!” 하고는 온갖 화려한 색종이와 반짝이는 것들을 꺼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기 위한 줄과 장식 들을 만들었다. 거친 숨을 내쉬던 엄마가 종이를 자르면서 조용해졌고, 이내 나는 크리스마스트리 꾸미기는 우리 가족을 화해시켜주는 마법과 같은 것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쯤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매일 듣는다. 아무 걱정 없던 내 유년기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어른이 된 지금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기가 쉽지 않았다. 흥겹거나 잔잔한 멜로디가 귀에 들어오는 듯했다가 얼어붙고 건조한 내 마음에서 튕겨 나가 불협화음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회사 일을 잊어버리고 잠시 딴생각이 필요할 때 틀어보았지만 이내 거북해져 버렸다. 내가 좋아하던 캐럴마저 불편하고 어색한 것으로 변해버리자, 어린 시절 내 추억마저 구정물에 더러워질까 봐 덜컥 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캐럴을 잘 듣지 못했다. 아니, 안전할 때 다시 들어볼 수 있게 당분간은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기로 했다. 그렇게 내 연말은 사라졌다.


내가 이렇듯 나와 늘 함께하는 회사의 파트너도 연말이 연말답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내 의견을 우선 들어주고 내 생각을 지지하는 그이지만, 그에게 내가 2022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데에 방해물이 될까 봐 염려스러웠다. 송구영신이 필요한 지금, 내가 회사를 출근하고 버티고 있어서 송(送, 보낼 송) 구(舊, 옛 구)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미래는 이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예견된 것이라 그게 언제가 될지를 내가 결정하자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송구영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회사와 이별하기 전에 몇 가지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글로벌 플랫폼 회사의 광고 매출을 성장시키는 세일즈 담당이다. 우선은 주요한 광고주들의 캠페인을 둘러보며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들은 없을지 생각했다. 내년 먹거리를 위한 제안이 되었든, 아직 전달하지 못한 내 인사이트든, 미팅을 통해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내진 못했지만, 똘망똘망한 눈으로 더 이야기해주세요 더! 라고 나를 쳐다보는 젊은 마케터들의 얼굴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대표나 임원급에게는 앞으로 유의해야 할 것들과 방향성, 새로운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줬다. 회사의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매니저에게 나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도닥여줬다. 마지막으로 내가 없으면 혼자 남을 내 파트너를 위해 다음 분기 예상 매출을 예측해보았다.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혼자 속으로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해.’라며 매일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매번 미팅이나 전화, 메일이 애틋했고 아쉬웠다. 그리울 것 같았다. 참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다.


중요한 광고주 들과 미팅을 순차적으로 마무리하고, 올해 업무와 내년 계획을 정리하며, 내 마음속 여러 번 되뇌었을 헤어짐의 인사가 다 되었다 싶을 때, 나는 HR 담당자에게 드디어 메일을 보냈다. “자, 이제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할 시간이야. 나는 이제 이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어.”




우리 회사의 세일즈는 담당하는 광고주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그들의 디지털 마케팅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하며, 이를 통해 비즈니스 성장을 지원한다. 그 과정에서 광고주가 지속해서 우리 광고 상품을 그들의 마케팅 활동에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결과적으로 광고 집행비를 꾸준히 확대할 수 있도록 한다. 산업마다 회사마다 팀마다 알고 있는 세일즈 업무는 다를 수 있지만, 간단하게 이해를 돕자면 우리 회사는 그렇다. 그리고 동시에 사내에 수반되는 업무들도 있는데 그 중 주기적으로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이 목표 매출을 설정하는 일이다. 산업 트렌드와 계절성과 같은 외부 요인, 담당 광고주의 비즈니스 상황과 마케팅 계획 등 광고주 내부 요인을 파악하고 우리 회사의 이번 시즌 주요 서비스와 상품과 내 인사이트와 전략 방향을 함께 고려하여 목표 매출을 설정한다. 담당자가 1차 목표를 제시하고, 회사의 기대치와 목표에 따라 숫자는 좀 더 상향 조정되기도 한다.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어 각자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치열하게 논의하여 적정 숫자를 정한다. 치열한 이유는 이 숫자에 따라 실수령 월급과 연봉이 달라지고 동시에 회사는 직원에게 지급해야 할 임금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보통의 글로벌 회사 세일즈 부서는 목표 대비 달성율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인센티브 구조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 인센티브의 조건과 규모는 연봉 계약서에 명시되며, 국내 회사에서 연간 성과와 평가에 따라 연말에 지급하는 보너스와는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목표 매출 예측과 설정은 개인적으로도 회사 입장에서도 정확도를 높일 수 있도록 늘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만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우리 회사처럼 본인이 예측한 숫자와 전망의 일치 정도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면, 거리에 나앉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거나, 인기 없는 직종이 될 수도 있겠다.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매출이 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내 월급통장도 좀 더 두둑해지니 기쁠 일이지만, 회사는 그만큼 지출 비용이 커지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너무 과하게 초과 달성해도 문제가 생긴다. 내 예측과 주장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며, 이는 이후 목표 매출 설정 시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초과 달성 시에도 어김없이 목표에 미달할 때와 마찬가지로 예측과 왜 다른지를 설명하는 자료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광고주가 최근 런칭한 신제품이 시장에서 반응이 예상보다 너무 좋다거나, 코로나와 같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쇼핑 니즈가 급증하여 캠페인 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근거 자료들을 준비하기도 한다. 그래서 늘 광고주와 긴밀하게 향후 계획에 대해 논의하고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캠페인 성과와 광고주의 비즈니스 성장 현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산업 트렌드와 전반적인 시장 경기도 살펴야 한다. 세일즈니까 돈 많이 벌어오면 회사는 좋지 않아? 라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너무 많이 벌어도 문제인 아이러니가 늘 존재한다.


목표 매출 설정은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는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다음 분기에 이 회사에 없을 수도 있는데, 매출을 예측하고 목표를 설정한다?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닐 테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나의 파트너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가 없어도 이 회사에 남을 파트너가 다음 분기 실수령 월급이 줄어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혹은 과하게 초과 달성해서 신뢰를 잃거나 변명해야 할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게 잘 예측하고 근거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제시할 숫자를 정하는데 신중을 가했고, 많이 고민했다. 한편으론 그저 회사 일일 뿐인데도, 남겨질 그를 위해 고민하는 내가 신파 드라마 속 주인공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닭살 돋는 책임감인지, 그를 향한 애틋함인지, 먼저 떠나는 자의 미안함인지, 나도 모를 그런 내 마음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어찌 됐든 참 다행인 건, 목표 매출 설정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히 그의 월급을 깎아 먹지는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만나면 회사 앞 이도곰탕에서 뜨끈한 국밥과 수육이나 한 그릇 사라고 해야겠다. 분위기가 허락한다면 맥주도 한잔 곁들어야지. 출근할 때는 아저씨 메뉴 같아서 그냥 그랬던 음식들이 꼭 회사에 못 가면 먹고 싶고 생각나고 그렇다. 그리고 꽤 어울리지 않나? 숫자에 전전긍긍하는 세일즈맨과 국밥과 술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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