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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pr 08. 2024

좋아하는 컵에 커피를 마시는 기분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드는 100가지 방법 중 하나

개운하게 잠을 잘 잔날, 스트레칭 후 샤워를 하면 따뜻한 물이 머리에 닿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굳었던 몸이 스트레칭으로 풀리고 가벼운 열기가 올라오고 콧등에 땀방울이 조금 맺힐 때, 여기에 더해 샤워기 따뜻한 물이 발끝을 적시고 머리를 적시고 뒷목을 타고 내려오면 간밤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간밤에 푹 잘 잤는데 피로라고 하니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잘 때도 나는 뭔가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잘 생각나진 않지만, 꿈에서 뛰어다니기도 날아다니기도 하는 듯하고, 일어나면 종종 잠옷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래서 샤워기 물의 온도가 딱 맘에 드는 날에는 그 몇 초 만에 긴장과 피로가 풀리고, 샤워가 금세 끝나는 게 아쉬워진다. 


샤워를 다 끝낸 후 내리는 커피의 향은 그래서 더 달콤하다. 그날 기분에 따라 드립백을 꺼내기도 하고 네스프레소 캡슐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그게 뭐든 처음 내려오는 커피의 진한 검정물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는 식욕을 자극한다. 드립백에서 머신에서 내려오는 까만 물줄기를 보며 집안에 퍼지는 커피 향에 기분을 맡긴다. 그럼 나는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다 커피가 입에 흘러들어오는 순간 몸으로 다시 빨려 들어온다. 


요즘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드립커피나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나의 모닝커피 원픽은 사실 따뜻한 라테다. 우유를 데우고 거품을 만들고 내렸던 에스프레소를 섞는다. 라테 아트를 만들 수 있는 재주는 없으니, 따뜻한 거품이 올라온 우유 위에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 때는 깊이가 좀 있는 컵이 좋다. 그래야 거품을 만드는 동안 우유가 흘러넘치지 않아서 설거지 거리가 줄어든다. 실용적인 입장에는 설거지를 적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그날 커피를 마시고 싶은 컵을 고르는 게 좋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엔 얼마 전 친구들과 갔던 전시회에서 나눠준 리유저블 컵을 쓴다. 얇은 플라스틱 컵이라 비싼 것도 아니고 특별히 좋은 점은 없는 하지만, 컵에 진한 커피가 바닥에서부터 점차 올라오는 보면, 그날 미술관에서의 기분이 같이 올라온다. '봤었더라'라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몇몇 작품들이 기억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아 서로 사온 굿즈와 도록을 펼쳐 보이며, 이래서 샀다 저래서 샀다는 사소한 이야기에서 시작한, 그래서 요즘 어떻게 살고 있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기억난다. 정확하게는 이야기 내용이 아니다. 이야기를 때의 공기, 창밖 햇빛의 온도, 파도처럼 휘어져있던 테이블의 모양, 꼬고 앉았던 다리, 왼쪽과 오른쪽의 친구들 다리, 같이 웃었던 기분, 그러다 목이 말라 조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던 느낌,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던 기억들이 잔에 같이 차오른다. 


몸이나 기분이 아직 처져있을 때엔 스페인에서 사 온 유머러스한 컵을 꺼낸다. 하얀 컵에 파란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컵인데, 아직은 볼 때마다 혼자 웃음이 나온다. 나는 마드리드의 작은 편집샵에서 그 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었다. 그러고 말 줄 알았는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 컵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날 그곳을 다시 찾아 컵을 사고야 말았다. 그 컵에는 동그란 엉덩이가 그려져 있고 두 개의 엉덩이는 각각 웃고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엉덩이 사이에는 활짝 핀 꽃이 한송이 꽂혀있다. 웃고 있는 엉덩이와 꽃 한 송이라니! 비록 차가운 도자기에 한 줄 사인펜으로 그려진 듯한 그림이지만, 어찌나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동그랗고 귀여운지. 그때 이후로 나는 이 컵을 쓸 때마다 어딘가에서 저렇게 웃고 있을 동그란 엉덩이를 상상한다. 그런 엉덩이를 만나면 꼭 활짝 핀 노란색 꽃 한 송이를 선물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히죽히죽 웃다 보면, 조금 남아있는 우울감이나 피로감마저도 날려버리곤 한다.


엄마가 만들어준 항아리 같은 파란색 머그컵은 추운 겨울에 잘 어울린다. 맘에 드는 짙은 파란색이기도 하고 손잡이가 두툼하고 커서 손가락을 끼고 양손으로 컵을 감싸면 뜨거운 라테를 호호 불어가며 먹기 좋다. 엄마의 초기 작품이어서 약간 울퉁불퉁한 부분도 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맘에 든다. 너무 매끄러운 컵은 공장에서 찍어 나온 것 같아 보이기도 하거니와, 잘 보이진 않지만 컵 여기저기에 엄마의 지문이 유약층 아래에 숨어있는 것 같다. 매주 보는 엄마이지만, 엄마가 그리울 때가 있기도 하니깐.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직접 보지는 않고, 그냥 보고 싶은 기분이 더 좋을 때. 막상 보면,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니까. 아쉬워서 보고 싶기 위해 떨어져 있게 되는 그런 기분. 


아무튼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컵에 고심해서 고른 커피를 담아 마시는 시간은 좋았던 기억을 소환하기에 딱이다. 그러니 다른 것도 아닌 모닝커피를 마실 때에는 그날 필요할 컵을 잘 골라야 한다. 엉덩이 그림을 보고 웃을지, 파란 컵을 보고 엄마를 생각할지, 우유에 섞일 듯 섞이지 않고 떠있는 에스프레소를 볼 수 있는 유리컵일지, 미술관으로의 외출이 생각나는 리유저블 컵일지, 여행지 추억이 생각나는 굿즈 컵일지, 집이지만 캠핑 간 기분이 드는 캠프컵일지. 어쩌면 그렇게 고른 컵 덕분에 뜻하지 않게 좋은 하루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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