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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May 14. 2024

받는 사람

주는 기쁨을 위한 받는 마음

여행지에서는 늘 냉장고 자석을 하나씩 사 오곤 한다. 촌스럽게 알록달록하거나, 유명한 관광지를 사진으로 찍었거나, 그 지역 특색을 강조한 화려한 수십 개의 자석들을 심사숙고해서 구경하다 그중 하나를 엄격하게 고르곤 한다. 이왕이면 사진보다는 그림이면 좋겠고, 특정 조형물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면 더 좋다. 귀여운 캐릭커쳐 느낌이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색깔의 조합이 경쾌하면 좋다. 그 여행이 잊힐 때쯤 자석을 보는 순간 이곳에서의 시간이 다시 떠오를 거니까. 자석이 귀엽고 경쾌한 만큼 여행도 밝게 기억된다. 여행을 추억하기 위한 기념품은 그 정도가 딱 좋았다.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았던 어린 시절엔 보는 것마다 새롭고 신기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다 보니 이것저것 사기도 많이 샀었다. 터키 커피가 인상 깊어서 커피뿐 아니라 작은 유리컵과 숟가락을 샀었고, 영국에서는 홍차와 주전자모양의 차우림망을 샀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유적지 모양을 한 메모지와 펜 세트, 베르사유궁전에서는 알약통과 거울을 샀었다. 일본 백엔샵을 처음 가봤을 때는 과자와 약, 물건들을 잔뜩 샀었다. 살 때는 그 물건들이 꼭 필요하고, 한국에 가면 절대 없을 것 같고, 가져가는 게 별 문제가 안될 것 같았지만, 막상 캐리어에 넣을 공간은 부족했고, 겨우겨우 욱여넣더라도 무거워져서 이후 이동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대영박물관에서 산 노트와 펜은 Made in Korea였고, 애써 가져온 물건은 한국에서 더 싸게 팔기도 했다. 커피와 홍차와 과자들은 다 먹지도 못하고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후 발견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이제는 작은 자석 정도가 딱 좋아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행 가는 걸 잘 알고 있는 가족과 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결국 그곳을 대표하는 과자나 물건들을 살 수밖에 없다. 누구까지 챙겨야 할지를 명확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물건은 결국 넘치거나 혹은 부족해져 버린다. 여행 마지막날은 기념품을 사기 위해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를 들를 수밖에 없다. 내 캐리어에 빈 공간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누구에게 어떤 것을 줄지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은 캐리어 공간이 부족해질수록, 여행 난도가 높은 곳일수록, 까다로운 숙제가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 다녀왔다며 나에게 기념품을 챙겨 주는 사람들이 무척 고마웠다가, 가져오는 수고를 생각해 보니 미안해졌다가, 그게 한두 번을 넘어가게 되면 부담스러워지곤 했다. R 언니가 바로 그랬다.


언니는 처음에는 여행용 향수나 핸드크림 같은 면세점 선물을 사서 주기 시작했다. 내가 즐겨 쓰던 물건일 경우에는 고맙고 반갑기도 했지만, 그 가격을 알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그래서 괜찮다며 두 손 들고 사양했지만 꼭 무언가를 내 호주머니나 품에 안겨주고는 도망치듯 떠나곤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행 경험이 쌓일 때마다 언니의 선물은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가장 최근 여행에 돌아와서는 쇼핑백 하나 가득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 쇼핑백에는 그곳에서 유명하다는 견과류와 젤리, 과자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고. 다양한 과자를 맛보라고 또 다른 포장 봉투에 서로 다른 과자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그건 이런 선물을 받는 사람이 나 말고도 꽤 된다는 뜻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이 산 거야?' 라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행 경험이 쌓일수록 기념품의 부피가 줄어드는 나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고맙고 반가웠다가, 언젠가부터는 미안했다가, 이제는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부담은 '나도 여행 가면 저만큼 사 와야 한다'라는 생각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은 주전부리나 귀여운 키링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유명한 꿀이나 쨈,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부피와 가격이 나가는 것들까지 손을 뻗게 되었고, 보답으로 가져온 그 기념품을 본 언니는 그다음 여행에서 배로 더 많은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더 많이 더 인기 있는 제품들을 사 와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기 시작했고, 선물 받는 순간이 고맙고 즐겁기보다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쟁하듯 여행 선물을 사 오고 있었다. 이 경쟁은 아니 이 싸움은 언제 끝날 것인가. 


여느 때처럼 엄마와 점심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남동생의 친한 형님이 가족들과 같이 먹으라고 햄버거 세트를 배달앱으로 주문을 해주셨다. 식사를 준비하던 나는 미리 이야기도 하지 않고 햄버거를 덥석 주문했다는 이야기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햄버거를 먹자니, 이미 준비한 밥과 국, 반찬들을 못 먹게 되었고, 준비한 밥을 먹자니 햄버거를 못 먹게 되는 거였다. "점심시간에 물어보지도 않고 햄버거를 주문하는 게 어딨냐?"라며 투덜거렸더니 동생은 "햄버거가 어때서~ 밥은 나중에 먹으면 되지. 나는 이렇게 안 물어보고 주문해 주는 게 좋더라." 라며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형님은 "이거 필요하냐?"라고 늘 물어봐서 불편하고, 이 형님은 물어보지 않고 보내줘서 고맙다는 거였다. 상대방이 물어보면, "아니요, 괜찮습니다."라고 거절하는 게 당연한지라 물어보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 보내면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는 거였다. 고마운 만큼 동생도 다음 기회에 뭔가를 선물하거나 잘하면 된다며, 그게 더 돈독해진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는 스트레스가 되는 호의가 동생에게는 감사한 배려였다니. 뭔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굳이 양자 중 택하자면 나는 물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먹을지 고민 중인 시간이었다면, "햄버거 먹을래? 너꺼도 주문해 줄까?"라는 이야기가 반가웠을 거였고, 이미 준비된 식사가 있다면 거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그 편이 나는 훨씬 좋았다. 그러나 한배에서 나온 동생과 나는 생각이 이렇게 달랐다. 


만일 R 언니가 내 지인이 아니라 동생의 지인이었다면? 그래서 여행 다녀온 기념품을 동생에게 안겨주었다면? 동생은 한아름 선물을 안겨주는 언니의 배려가 고맙고 즐거웠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모습을 보고 언니는 주는 기쁨을 더 크게 느꼈겠지. 어쩌면 언니와 나는 경쟁을 한 게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나와 경쟁한 적도 싸운 적도 없었다. 그저 나만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경쟁하듯 선물을 사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아닌가 싶었다. 


언니는 코스트코 같은 대형마트를 가면, 형부와 둘이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의 물건들을 덥석덥석 샀다. 그리고는 싸게 많이 샀다고 즐거워하며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주기 바빴다. 나 같으면 조금 비싼 가격이라도 필요한 만큼만 샀을 텐데. 조금 저렴하게 그러나 많이 사서 결국은 더 큰돈이 나가는 언니의 소비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물건을 주변과 나눔으로써 남기거나 버리지 않고, 더불어 나눈다는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이제는 햄버거 사건을 통해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냥 주는 게 좋은 사람이 있는 거구나 싶었다. 상대방에게 다시 돌려받는 걸 생각 안 하고 주는 행위 자체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쇼핑백 안에 다양한 과자들이 다시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마카다미아를 어떻게 까먹으면 되는지 설명을 들으면서, 이게 만일 <선물하기> 대회라면 나는 언니에게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고깃집에서는 늘 집게를 들고 구워서 사람들 접시에 음식을 나눠주느라 바빴고, 집으로 놀러 가면 술과 안주거리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좋은 게 있으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사 와서 주변을 나눠주는 언니의 퍼주는 행동들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은 내가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주는 바람에 쓰지도 버리지도 못해 당황했고, 천천히 대화하며 적당히 먹으며 즐기고 싶은 저녁시간을 급하게 과식하게 만드는 분위기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예쁜 포장지와 리본으로 포장까지 된 여행 기념품들을 보면서, 이게 언니는 행복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는 게 행복한 사람이구나,  고맙게 받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구나 싶었다. 가끔 그게 부담스럽고 필요 없는 베풂이라 할지라도, 주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언니는 즐거웠겠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이제까지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 있고 싶은 시간에 끊임없이 밖으로 불러내는 친구가 부담스럽고, 먹기 싫은 음식을 몸에 좋다고 자꾸 먹으라고 재촉하던 할머니가 미웠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는 것을 원하는 사람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주는 것도 배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걸 더 좋아하는 R언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받기만 한 게 미안해서 밥도 사고 선물도 하지만, 그 후엔 늘 두 배 세배가 되는 호의가 돌아왔다. 나는 그게 부담스러웠지만, 만일 얼굴에 그런 내 기분이 드러났었다면 주는 언니는 얼마나 슬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니에게는 나는 즐겁게 받는 동생이 되기로 했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를 받고 여행지에서 선물을 고르느라 골치 아프겠지만, 주는 기쁨을 위해 앞으로는 잘 받는 사람도 되기로 했다. 그게 언니를 위한 나의 배려이고 애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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