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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May 22. 2024

몸으로 직접 해보는 것

북한산 바위벽을 오르다

"우리 같이 산에 가자"를 말로만 몇 년째 반복하다 S언니와 드디어 북한산에 갔다. 등린이도 갈 수 있는 곳이라길래 운동복바지에 운동화를 신으려다가, 그래도 북한산인데 싶어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 언니와 처음 가는 등산이니 그늘에 앉아 과일을 먹으면 좋겠다 싶어 껍질째 먹는 포도를 씻어 도시락통에 담고, 선글라스와 민트 사탕, 카메라와 생수 2통, 그리고 손수건도 2개나 챙겼다. "D 선생님은 맨발로도 가는 코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했는데, 나는 큰 산을 정복할 기세로 이것저것 챙겨 가방을 꾸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잘한 선택이었다.


연신내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그곳이 오늘 등산로의 시작이다. 작은 절을 지나 시작부터 계단을 만나니 매주 동네 뒷산에서 체력을 키웠다고 큰소리쳤던 게 부끄러울 만큼 숨이 차올랐다. 초입부터 헉헉대며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올라가니 이내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역시 북한산은 북한산이었다. 운동화가 아니라 등산화를 신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옆으로 돌아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한 D선생님이 "오늘 우리 저 바위 봉우리를 탐험해 볼까요?" 라며 방금 본 그 바위를 가리켰다. 에이 설마. 농담이겠지 했는데, 선생님은 재차 "보기엔 이래도 막상 올라가면 에이 별거 아니었네 싶을 거예요. 전에도 그랬어요." 라며 내가 용기 내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분명 등린이도 갈 수 있는 곳이라 그랬는데. 언니가 내 얼굴을 힐끗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보기보다 갈만해. 등산화 바닥 괜찮지?" 라며 올라갈 채비를 하는 거였다. '등린이도 갈 수 있는 코스라더니. 애초에 등산하는 사람 말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요! 가요!"라고 큰소리를 쳤다.


오래된 등산화 바닥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접지력은 괜찮은 것 같았다. 발목까지 끈을 한번 더 올려 단단히 묶고는 언니 뒤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면 아찔했다. 앞과 위만 보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힘들어지면 두 손으로 바위를 잡으며 네발보행을 했다. 어쩌면 인왕산 기차바위 경사와 비슷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라가는 것도 이 정도인데 내려갈 땐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덜컥 들기 시작했다.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는 이미 늦었다. 그런 걱정이 들자 발이 빨라지고 나는 언니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어느덧 아래에서 보고 기겁했던 첫 번째 바위 꼭대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사이 나처럼 등린이라고 했던 선생님은 등산화를 가방에 넣고 맨발로 바위를 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화강암을 밟으면 진액이 나오는 것처럼 발이 착착 붙는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올라가고 있었다. 가끔 나처럼 두 손으로 바위를 짚고 올라갈 때는 한국판 스파이더맨을 보는 듯했다. 어쩌면 그의 두 손 두 발엔 거미줄처럼 찐득거리는 뭔가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그런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행복해진다. 등산은 이런 재미로 하는가 싶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보이지 않는 고양이버스가 이 산을 달려 지나가는 상상을 한다. (애니메이션 토토로에서 고양이버스가 달려가며 바람을 만들지만, 어른들은 그 버스를 보지 못한다) 이마 밑으로 꽁지머리 끝으로 매달린 땀들을 훑어내며 모자 벗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건너편 봉우리를 한참 쳐다보다 챙겨 온 포도를 꺼냈다. 선생님이 가져온 토마토, 당근, 사과를 함께 먹으며 엄지 손가락보다 작은 솔방울들을 바위 아래로 던졌다. 고도가 높고 바람이 넘어가는 곳이라 그런지 이곳 소나무는 키가 작고 귀여웠다. 솔방울은 내 허리나 어깨 높이에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고, 작년 솔방울이라 떨어지는 게 맞다는 언니의 말에 갈색으로 마른 솔방울들을 톡톡 건드리듯 따서 바위 위로 한가롭게 하나씩 던졌다. 또르르 굴러가다 바위 굴곡에 맞춰 톡톡 튀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가 앉은 곳의 높이가 느껴져 오금이 조금 저려왔다. 평일이라 사람들은 없었고, 가끔 건너편 능선을 걸어가는 알록달록하고 작고 동글동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빨간색 파란색 옷을 입은 등산객들이었는데, 주황색 바람막이를 입은 내 모습도 저들이 보면 그리 보이겠다 싶어 귀엽다 생각했다. 


건너편 바위 봉우리를 바라보고 한참 바람을 즐기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내려갈 채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슬슬 내려가면 점심시간이 될 것이고 그럼 우리는 냉면을 먹기로 했다. 조금 전 네발로 기어올라온 아찔한 그곳을 직접 마주하며 내려간다 생각하니, 토도독 톡톡 굴러 내려가던 솔방울들이 생각났다. 언니가 한 발 앞서 가며 튀어나온 나무들을 잡아주고, 덜 미끄러운 곳을 알려주었다. 그런 언니를 믿고 내 발을 믿고 등산화의 접지력을 믿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무서울 땐 미끄럼 타듯 앉아 두 손으로 뒤를 지탱하며 뒤집어진 스파이더맨 자세로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큰 바위 꼭대기였다. "아까 거길 내려오니 여긴 평지 같죠?"라는 선생님 이야기에 "아니요~"라고 외쳤지만, '어랏? 여기가 이렇게 편한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 올라올 때보다 훨씬 완만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바위가 올라갈 때 내려갈 때 달라질 리야 없건만, 점점 가팔라지는 경사를 정복하고 나니, 이제는 꽤나 편안해졌다. 처음에는 '이 바위 벽을 오른다고?' 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나는 어느새 언니 말대로 풍경을 즐기며 지그재그로 편안히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언니마저 앞지르고 먼저 토도독 톡톡 내려가고 있었다. 


평평한 곳에서 방금 올라갔다 내려온 곳을 올려다보니, 처음 볼 때와 마찬가지로 바위산은 거대한 위엄을 뽐내며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우리가 저기를 올라간 거예요."라는 말에 "설마요." 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건 집에 와서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바위벽은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그곳을 올라갔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었다. D선생님과 S언니가 내가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의 증인이다.


여전히 겁은 나지만, 어쩌면 이 바위를 다음에 또 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것과 기어서라도 몸으로 올라가는 것은 많이 달랐다. 바위벽 경사에 미리 겁을 먹고 밑에서 기다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거였다. 혹은 다른 길을 가자고 설득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믿고 해 보니, 거기엔 바위산을 정복한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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