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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Jun 19. 2024

이 곳엔 나, 그리고 책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고

오랜만의 독서 리뷰글이다. 책을 열심히 읽지 않기도 했지만 대충 봐도 10권 넘는 책을 이리저리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면서 찔끔찔끔 읽다 보니, 완독하고 리뷰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어떤 책은 감정선을 다시 잡기 위해, 인물 관계가 생각나지 않아, 줄거리가 헷갈려서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했으니 말이다. 예전엔 평일 저녁에 읽는 책, 주말에 작정하고 읽는 책, 잠이 안 올 때 읽는 (졸린) 책, 외출할 때 가볍게 읽는 책 정도로 동시에 읽는 책이 3~4권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새끼를 쳐서 10권이 넘는다. 


그렇게 된 데는 좋은 책,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보던 책이 있어도 못 참고 구매하고, 구매한 책은 조금이라도 읽어보는 습관 때문이다. 책이든 옷이든 공구든 기다리던 택배가 오면 열어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그런 조급한 마음인 거다. 게다가 주변에서 추천이라도 받는다면 사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들을 제치고 패스트 트랙으로 그 책을 먼저 구매한다. 크리스티앙 보뱅도 그랬다. 최근 시작한 사진 스터디로 알게 된 전윤영 사진작가님이 SNS에 올린 책의 한 구절에 꽂혀, DM으로 이게 무슨 책이냐를 물었고, 바로 예스24에서 구매했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내 손이 닿을 만한 곳에는 다양한 개성의 책들이 나뒹굴고 있는데,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 이 책 또한 처음 겪어보는, 그래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책 커버는 어디서 많이 본 듯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에르노의 책에서 봤던 디자인이었다. 중간에 사진이 한 장 있고 그 위아래로 작가와 책 제목이 적힌, 1984books 출판사의 스타일이었다. 이 책은 독서와 글쓰기에 대해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에게 작가가 이야기를 건네는 식으로 진행된다. 잠깐씩 다른 이야기가 섞이는 듯 하지만, 결국 책 주위를 맴도는 이야기로 돌아오고, 그러다 사랑을 이야기하며 책은 끝이 난다. 중간에 모르는 책과 작가가 나오면 흐름이 턱 하고 막혀 책을 잠시 제쳐두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곤 했는데, 특히 라신의 로마황제와 팔레스타인 여왕이 등장하는 부분이 그랬다. 찾아보니 장 라신의 <베레니케>였고, 그 책은 물론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비교적 최근의 책까지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이 두 책을 장바구니에 넣고 살까 말까를 또다시 고민하게 될 듯하다. 


보뱅은 시인이다. 그리고 이건 시인의 에세이다. 에세이라고 하지만 읽는 내내 산문시인지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역시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저 그가 '당신'에게 건네는 말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가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의 감정과 생각, 보고 있는 것들을 뭉뚱그린 이미지 같은 것들이 눈과 피부를 통해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종종 가슴을 파고드는 문장들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럼 나는 그것들을 밑줄을 긋고 다시 읽다가, 참지 못하고 노트를 꺼내 필사를 했다. 차분히 앉아 천천히 읽기 좋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오롯이 혼자되는 시간이 필요할 때 펼쳐야 한다. 아니 오롯이 혼자되는 시간이어야지만 허용되는 책이다.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볼 수 없는 책이다. 저녁 메뉴가 고민이거나, 낮에 만난 사람이 했던 말이 생각나거나, 미뤄둔 일의 한 조각이 떠오르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보던 중간쯤, 다시 맨 첫 장으로 돌아갔다. 나와 이 책, 단 둘만 남아야 했다. 완벽한 침묵과 고독의 시간 틈에서 문장을 들이밀고, 이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잡아 뜨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야 문장이 들어오고 감각이 살아나고 작가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아기 걸음마 같은 발걸음이었다. 처음 모국어를 배우는 감각이기도 했다. 모르겠지만 이해하게 되는, 뭔지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느껴지는 그런 글자들. 


그래서 글을 보며 느끼는 감각은 꿈에서처럼 확실하지 않고, 이미지는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 특히 소녀가 백마를 타거나, 여자가 아이를 재우고 식탁에서 글을 쓰거나, 인터뷰 마지막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를 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다 기차 플랫폼의 사람, 은행 빚을 지고 산 똑같은 빌라, 쇼핑몰에서 마주친 이웃 부부를 만날 땐 갑자기 꿈을 깨 현실로 발을 디딘 것 같아 조금 선명하고 슬펐다.


책을 모두 읽고 닫으니, 머리와 가슴에 몇 장의 그림엽서가 남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파란 바다와 하얀 모래가 있는 여행지의 사진일 수도 있고, 잔디밭과 꽃 그리고 고양이 일러스트일 수도 있겠다. 예쁜 여자와 남자의 뒷모습일 수도 있고, 오래된 유적이 빛바랜 위엄을 드러낸 모습일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들어 벽에 테이프로 붙인다. 그럼 길어진 햇빛이 창문을 통과해 그림엽서 위에 빛으로 긴 꼬리를 만들고, 그림들을 쓸어내리고, 서서히 삭아내린다. 결국 책은 사라지고, 감각은 희미해지고, 겨우 한두 개의 문장만 가슴에 남는, 기분이었다.



<100자 평>

혼자되는 시간이 필요할 때, 몰입과 집중으로 외부의 자극과 머리속의 복잡한 생각을 잠시 제쳐두고 싶을 때, 좋은 문장에 휩싸여 마음이 호화스럽고 싶을 때, 이 책을 열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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