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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Jul 14. 2024

타인이지만 가까울 수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요즘 단편소설을 쓰고 있다.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한겨레 교육센터에서 다짜고짜 소설 쓰기 강좌를 신청했고, 매주 금요일밤 나는 친구들과의 불금 약속 대신 신촌 교육센터로 향하고 있다. 원래도 알쓰(알코올쓰레기)였지만 술을 마시면 주말에 늦잠을 잔다거나, 두통으로 하루이틀 시간을 버려야 한다거나, 컨디션을 다시 끌어올리는데 시간이 걸리는 게 아까워져서 금요일 습관적인 술도 끊었다. 그래도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끈적임을 날려버릴 차가운 맥주나 음식과 잘 페어링 된 와인이나 부드럽거나 개성 넘치는 위스키는 여전히 사랑한다. 옆으로 이야기가 많이 샜는데, 아무튼 나는 요즘 단편소설을 써보고자 노력 중이다. 


그러던 와중 편성준 선생님의 <읽는 기쁨> 책을 보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단편을 추천해 주신 것을 보았고, 책장에 꽂혀있었지만 읽지 않았던 수많은 책 중에 그 책을 찾아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데로 갓 구운 롤빵은 아이를 잃은 부모를 위로했고, 불행 중에서도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그 부모는 계속해서 그 롤빵을 먹으며, 따뜻한 빵의 온기를 느끼며,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 살아나갈 용기를 얻을 것이다. 단편을 다 읽고 난 후엔 늦은 밤 홀로 불을 켜고 빵을 구워내는 빵집이 도심 오아시스처럼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상처와 불안으로 점철되는 마음이 있다면 그곳에서 빵이 구워지는 냄새를 맡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편과 함께 레이먼드 카버의 다른 단편들도 함께 읽었는데, 몇몇 단편들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스토리와 캐릭터에 집중한 장편소설에 너무 익숙해져서, 혹은 대놓고 설명해 주고 보여주는 소설들에 너무 익숙해져서, 간결한 문장 속에 드러나듯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의미들을 캐치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드니 소설을 배우는 입장에서 한참 자격미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 쓰기 하룻강아지라고 해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천천히 두 번씩 곱씹어 봤다. 그리고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책의 맨 뒷부분 김연수 작가의 해설이었다. 이 단편들을 쓸 때의 카버의 상태라던가, 숨겨진 의미들, 반복해서 사용하는 메타포들을 알 수 있어,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라며 읽은 단편에서 카버가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잘린 귀나 귀지로 막힌 귀로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고, 화장실을 소설 속 인물이 무언가를 자각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거나, 신의 존재 앞에 왜소한 인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 들을 해설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단편만 있었다면, 어쩌면 수박 겉핥기로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간결한 문장들이 주는 은근한 이미지라던가 배경지식 없이 텍스트만으로 알 수 있는 것들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있을지 몰라도, 왜 이런 글을 썼지 라는 끊임없는 독자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가장 좋았던 단편은 '대성당' 편이었다. 보지 못하지만 볼 줄 아는 맹인을 통해 멀쩡한 눈을 가졌지만 오히려 보지 못하는 화자가 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손의 감각으로 타인과 하나가 되고, 손이 그리는 그림을 따라가고 진짜 보게 되는 장면, 그래서 눈을 감고 좀 더 있고 싶어 한 화자를 보니, 최근 하고 있는 사진 스터디의 '감각 깨우기'가 생각나기도 한 장면이었다. 나도 어쩌면 경주마처럼 눈 옆을 가린 상태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집스럽게 보고 있는 것을 임의로 차단하니, 그간에는 너무 약해서 아니 무시하고 있어서 느낄 수 없었던 소리와 냄새, 온도,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와중에 상대, 혹은 내 안의 무언가와 교감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틈으로 뭐라 형언하기 힘들지만 새로운 세상의 틈이 살짝 벌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체적이고 명확하진 않지만 느껴지는 것, 설명하긴 어렵지만 따뜻하거나 서늘하거나 환상적인 것을 감각하는 것. 그런 이유로 이 책의 단편들은 다소 시적이었다. 그저 드러나있는 스토리와 인물들만 따라가서는 재미도 의미도 찾기 힘들었으리라. 맹인을 따라 눈을 감고 손을 따라가듯, 카버의 문장이, 등장인물의 시선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고독한 타인과 타인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한다.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너무 늦어버린 시도, 가슴 아픈 실패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종국에는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거기엔 두려움도 종종 있지만 신선한 자극과 설렘이 존재한다. 


작가의 생각을 곱씹으면서 따라갈 수 있었던 책. 대놓고 설명하지 않아 천천히 읽어볼 수밖에 없는 책. 짧지만 결코 그 무게는 가볍지 않은 책. 담담한 문체로 꾹꾹 눌러 담아 슬픔도 좌절도 단번에 느껴지지는 않지만 뒤늦게 뭉근하게 올라오는 책. 화려하지 않지만 깊이 있는 책. 나에게 이 책은 그랬다. 왜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소설 쓰기 마지막 과제가 남아있다. 원고를 PDF로 저장하고 보내기 직전까지 아마도 나는 계속 이 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할 것 같다. 



<100자 평>

간결한 문장 속에 인간과 인생에 대한 서늘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고찰이 숨어져 있다. 빠르게 훑어서는 알 수가 없으니, 화자가 있는 그곳에 나도 있다는 상상으로 감각해 보자. 어느 순간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는 말이 절로 나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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