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이 책이 언제부터 책장에 꽂혀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충동구매하듯 책을 사버리는 몹쓸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좋은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늘 생각한다. 하긴 책은 대체로 좋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 적지 않은 분량을 작가가 써 내려가는 용기와 꾸준함이 담겨있고, 그 글을 발굴하여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안목과 기술이 있는 출판사가 있었을 테니, 좋지 않은 글이 나오는 게 더 어렵긴 하다. 그럼에도 너무 단순한 구조나 단편적인 캐릭터라던가, 겉핥기 같이 짤막하고 가벼운 글들이 요즘 들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책을 읽고자 하는, 책에서 얻고자 하는 어떤 것들, 그런 갈증 같은 것을 해소하지 못하는 책을 잘못 집어 들었을 때엔, 지나간 한두 시간의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해소되지 않은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답답해지기도 하니깐. 그런 와중에 이 책은 얇은 분량임에도 가볍지만은 않게 나를 지나가 갈증을 씻어주고 그 자리에는 단번에 끝나지 않는 여운을 남겨주었다.
주인공인 펄롱은 아내와 사랑스러운 다섯 딸을 가진 착실한 석탄 목재상으로 크게 부유하진 않지만 성실하여 배곯을 일 없이 딸들을 자랑스럽게 잘 키워낼 수 있는 든든한 가장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다는 결핍이 있고, 자신을 임신한 어린 어머니를 거둬준 시미즈 윌슨 부인에 대한 감사함이 있고,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게 숨어서 배려한 네드, 엄마, 윌슨 부인의 따뜻한 뒷바라지가 함께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저 잘난 집에서 다르게 자라났다면 모르겠으나,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자수성가하여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다면 모르겠으나, 어쩌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를 본인의 유년기를 주변의 어른들 덕분에 나름 따뜻하고 반듯하게 살아온 경험과 그것을 인지하는 힘은 소설 후반에 나타나는 그의 어렵지만 대단하고 당당한 결정에 크게 관여한다. 비록 그것은 검은 고양이가 죽은 까마귀를 뜯으며 입술을 핥고 있는 것처럼 험난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불안함을 동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후반까지 막연하게 음산하고 불안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고 트리 전등식을 하고 맛있는 케이크를 굽고 따뜻한 차를 끓이는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보다는 쌀쌀한 겨울 날씨에 자물쇠가 성에에 덮여 꿈쩍 않는 것이라던가, 검은 물이 흐르는 배로강 (특히 매년 3명이 죽는다는 전설!), 까마귀가 뒤덮은 겨울의 하늘과 같이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은 소설 전반을 흐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이지만, 그저 쌀쌀하고 축축할 것 같은 아일랜드의 날씨가 책을 읽고 있는 지금은 여름인데도 주변이 스산하게 느껴져서 순간 겨울이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런 날씨와 더불어 펄롱은 계속해서 답답하고 불안하고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펄롱이 결심하고 세라를 수녀원에서 데려오는 그 시점부터 소설에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급격하게 쏟아진다. 그간의 불안감과 어두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에게는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그의 오랜 고민이 끝났다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외면하지 않고 행했어야 할 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한 마음이 주는 편안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당했고 행복했다. 비록 앞으로 다섯 딸들이 세인트 마거릿 중학교에 무사히 다닐 수 있을지, 석탄 목재상으로 이 마을에서 경제활동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 지금까지와 같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어졌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인간이라면 했어야 할 바람직한 선택과 행동이 실제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고뇌하고 번민에 휩싸이는지를 천천히 날카롭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 어려운 선택을 한 펄롱을 지지하게 되고, 그 이후의 서사에 대해 기대하게 되고, 인간에 대해 응원하게 되고, 나약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거대한 권력 (성당과 국가)이 행하는 악에 정면으로 대응하진 못하더라도 작게나마 행동하는 개인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아직 이 세상은 살만하구나 라며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다. 처음 이 책을 볼 땐 수녀원 세탁소의 불의를 고발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 보고 나니 그럼에도 우리 안의 인간성을 버리지 않기를 기대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펄롱처럼 석탄광에서 세라를 만난다면, 나는 그녀에게 외투를 벗어주고 손을 잡고 내 집까지 같이 걸어올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모든 감정을 압도하더라도,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하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펄롱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볼 수 있을까. 책을 두 번 읽는다고 없는 자신이 생기진 않지만, 책을 읽는 당분간 시간 동안 용기 내는 상상을 해본다.
<100자 평>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친절-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포함-이 모여 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우리는 결국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우리에게 남은 인간성을 믿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