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읽고 느낌만 남기고 사라지는 책이 있고, 시간이 지나며 느낌마저 사라져 표지가 낯선 책이 있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이 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이 책은 세 번째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분명 소설인데 전체를 흐르는 시 같은 아름다움과 묘연함, 담담한 문장이라 더 처연하고 아팠던, 게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잔혹하고 생생한 폭력. 그것들이 회오리치듯 맞물려 왜 이렇게 슬프고 아름답고 괴롭지 라는 생각을 반복하게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겠지만, 그럼에도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정도라면 한강 작가의 세계가 더욱 궁금해지고 그 문체를 다시 듣고 싶고 곁에 있고 싶을 텐데, 그래서 더 읽어봤을 텐데 나는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책을 읽으며 애쓰는 만큼 살이 빠진다면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정도로. 그러니 다른 책을 더 찾아 읽어볼 체력이 없었다.
얼마 전이었다. 아니 벌써 몇 주 전이구나. 을지로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 겸 청계천을 걷다가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갔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을 보고 또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맘에 드는 한 권을 들고 을지로로 돌아왔을 때였다. 함께 간 S가 핸드폰을 보더니 갑자기 '꺅!'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나오는 하얗고 파랗고 노란빛이 S의 얼굴에 비쳐 어둠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갑작스럽게 만난 놀라움이랄까, 그녀는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는 내 말에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를 그렇게 놀라게 한 소식은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뉴스였다.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고, 현실감각이 없어 생소했고, 집에 돌아와 뉴스를 찾아 발표 장면 영상을 보며 진짜구나 라며 실감했다. 대단하다 와 멋지다는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침대에 누워 노벨상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게시물을 찾아보고, 지인과 각종 출판사에서 올리는 축하 메시지를 꼭 나에게 오는 것인 양 찾아 읽고 좋아요를 눌렀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책을 한 권 밖에 읽지 못했는데.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요?라는 질문에 한강 작가요라고 대답한 적도 없는데.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이제야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대표 작품이라 읽은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남들 읽는다고 따라 읽는 냄비 근성인가 싶은 불편함도 있었다. 이걸 이제야 본다는 미안함도 있었다. 그 감정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밀려다녔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채식주의자>와는 또 다른 색깔의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인간의 잔혹한 폭력과 그 앞에 당당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근간으로 하니 그 쓰라림은 한층 더 했다. 써 내려간 작가의 용기와 괴로움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라는 생각에 경외감이 들었다. 게다가 더 놀란 것은 소년 동호가 한강 작가가 실제로 살다가 이사 나온 그 집에 이사 왔던 소년이라는 것. 게다가 한강작가의 아버지가 재직한 학교 학생이었다는 것. 실제 존재했던 인물에게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어 소설에서나마 다시 그때로 돌아가 소년의 마음을 쓰다듬고 기억을 더듬었던 것이었다.
소년 동호는 시위에서 죽은 친구 정대를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상무관에 가서 친구의 시신을 찾는다. 그러다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기 시작한다. 군인에게 죽었는데 왜 태극기를 덥고 애국가를 부르냐는 질문을 던진 동호, 중학생은 집에 가라는 이야기를 거절하고 끝까지 남는 동호, 죽을까 봐 떨었지만 어떤 마음에선지 결국 상무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동호. 이미 죽어서 혼령이 되어버린 정대와 살아남은 은숙누나, 선주누나, 진수형, 동호의 엄마는 각자의 방식대로 동호를 기억하고 부른다. 죄책감, 분노, 양심, 기억 같은 것들이 살아있는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살아있게도 혹은 죽음을 택하게도 한다.
읽으면서 스티븐 핑거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책이 생각났다. 선하기는 지랄, 이게 선한 거야 욕하며 중간즈음에 덮어버렸던 책이었다. 초반에 나온 잔인무도한 인간의 전쟁, 살육의 역사와 통계들을 보다 보니, 그 두꺼운 분량의 잔인함을 이겨내고 후반부까지 넘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 악마를 제압하여 인류역사에서 폭력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젠장 믿을 수가 있어야지.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그 책이 다시 생각났고 어딜 봐서 폭력이 감소한다는 건지 욕지거리가 또 튀어나올 뻔했다.
그럼에도 한강 작가는 주저앉기보다는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악몽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다시 찾아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되었다가 다시 그들을 지켜보며 일어나선 안될 폭력을 이야기한다. 잔인한 폭력의 피비린내가 책 너머까지 새어 나오는 것 같아 금세 발견하긴 어려웠지만, 작가는 몇 가지를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었다. 그건 기억하라, 인간이길 선택하라, 그리고 살아내라. 무작정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 당부대로 하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죽어 혼령이 된 정대는 썩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증오하지만, 살아있었던 시절의 추억을 악착같이 기억하며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은숙누나는 억울하게 맞은 일곱 대의 뺨을 잊기로 하지만, 결국 마지막 뺨을 잊지 않기로 결정한다. 동호를 기억하고 연극에 나온 동호를 닮은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진수 곁에서 살아남았던 남자는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우며 동시에 죽음만이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운다. 선주 누나는 눈앞에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에서 동호를 느끼며 죽은 동호를 찍은 사진을 보고 분노의 힘으로 다시 살기를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동호의 어머니는 삼십 년이 지나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었지만 태어나 젖을 물었던 아기 동호, 상무관에서 집으로 돌아갈게요라고 약속했던 동호의 마지막 뒷모습, 그리고 엄마 손을 잡고 밝은 꽃 핀 쪽으로 이끌던 어린 시절 동호를 내내 기억한다. 그러니 동호는 죽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서 동호는 1장에서 죽기로 결심하고 2장에서 죽었다. 3장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4장에서 돌아왔으며 5장에서는 죽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장에서 밝은데 꽃이 많이 핀 곳으로 가라고 손을 잡고 이끈다. 그렇게 소년은 왔다.
지하철, 카페, 집 소파에서 읽다가 훌쩍거리다가 끝내는 오열을 했다. 휴지로 닦아낸 눈 언저리가 마르기도 전에 축축해졌고 다시 손수건으로 휴지로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글자들이 뿌옇게 흐려져 보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엔 눈 주변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쓰라렸다. 하지만 쓰라린 통증마저 읽는 내내 과분했다. 그들이 희생자가 되지 않게 기억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되뇌었다. 만일 나에게도 있을 야만성과 숭고함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무서워 도망치더라도 야만성만은 깨우지 말자라는 치사한 생각을 했다.
노벨상을 탄 건 한강작가의 쓰는 재능과 지독히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폭력을 마주하는 용기와 끝까지 써 내려간 진정성 때문일 거다. 거기다 나는 동호와 은숙과 선주와 진수, 그리고 상무관의 혼령들이 모여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 외쳤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들의 들리지 않는 외침이 모여 진동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상상을 했다. 그 마음이 모여 용기를 낸 작가를 통해 염원을 이루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진실은 언젠가는 통하게 마련이니까. 진실이 이기는 날은 꼭 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