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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29. 2024

국악경연대회를 준비하는 마음


책상 위에 작은 머리핀 박스 세 개를 와르르 쏟아냈다. 지난번 공연이 끝나고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핀들은 여기저기 엉켜 있었다. 좀 더 신속하게 머리를 매만지고 핀을 꽂기 위해서는 똑딱 핀, 일자핀, U자핀들을 따로 정리해야 한다. 구부러져 재사용이 어려운 것은 발라내 버리는 게 좋다. 내일 있을 국악경연대회를 생각하며 핀을 정리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언제부터 이랬다고.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부터 출발해야 했기에 그런 생각을 휘휘 저어 흐트러트리고 얼른 핀을 정리하고 가채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필요한 헤어 에센스와 왁스를 챙기고 꼬리빗이 있는지를 살펴본 후 캐리어 한쪽에 메이크업 파우치와 함께 넣었다.


10월은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냉장고를 털어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동네 김밥집에서 산 김밥과 과일과 커피를 싸들고 어디론가 드라이브 가고 싶은 날씨. 새벽 공기 마시며 출발해도 좋고 이왕이면 주말 내내 들판을 바라보거나 바닷바람을 맞거나 땀을 좀 흘리며 산을 오르거나, 아무튼 낯선 곳에 가서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은 날씨. 봄과 가을 짧게는 한 달, 조금 길게는 두 달 정도 그런 날씨가 있다. 그러니 바쁜 직장인이던 시절 이때의 주말은 귀하고 귀했다. 요리에 아껴 넣었던 트러플버섯오일처럼, 어린 시절 서랍 속에 숨겨놓고 혼자만 몰래 꺼내 먹었던 마카다미아 초콜릿처럼, 작고 귀여운 여행용 화장품 세트처럼. 그래서 날 좋은 봄과 가을 주말만 골라서 열리는 국악경연대회가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OO 대회 나갈래?라는 선생님의 질문, 그 속에 숨은 강한 권유, 그래서 거절했다가는 말이 길어지고 앞으로 피곤해질 거라는 예감, 그러다 결국은 네, 나가겠습니다라고 귀결될 그 말이 선생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늘 작은 한숨이 커다란 닻이 되어 목에서 가슴과 배를 통과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대회를 다녀온 후 한복과 물건들을 꺼내 정리할 기분도 여력도 없었고, 그 상태 그대로 다음 공연이나 대회를 맞이했다. 하물며 작은 핀들은 오죽하랴, 엉망으로 구겨진 채로 U자핀은 제 기능을 상실했다. 여기저기 상자에 끼어들어가 꺼내 쓸 때마다 손을 흔들며 엉겨 붙어 올라오는 다른 핀들을 짜증섞인 손짓으로 탈탈 털어냈다.


그런데 생각이 조금 달라지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대회에 나가면서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하면서 소리는 단단해진다. 느슨하고 물러터진 터치가 내는 소리로는 무대를 채우고 심사위원의 귀까지 도달하기 힘드니까. 소리가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차분해져야 하고, 몸에 힘을 빼고 단전과 호흡에 집중해야 한다. 긴장을 풀고 평상시의 평온한 상태에서 최상의 연주를 끌어내야 하니 평소 연습이 중요하다. 그러니 대충 멜로디를 따라가는 연습이 아니라 한음 한음에 음정과 박자는 물론 농현(왼손으로 현을 흔드는 것)과 산(살짝 눌렀다 올라오는 음) 같은 것들을 세심하게 다듬어야 한다. 강약으로 감정을 전달하고 아련하거나 카리스마 있거나 그 사이를 순식간에 오가야 한다. 교습소에서 내가 악보를 보고 치는 피아노 선율과 대가들이 치는 피아노 선율이 다른 것은 그런 세세한 한 끗 차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조성진의 유명한 짤이 그걸 조금 설명해 준다. 영상에서 조성진 피아니스트는 한쪽 손으로 공기를 천천히 가르다 새 한 마리가 잔잔한 호수 위에 착륙하듯 건반에 착륙한다. 그리고 건반을 누르기 전부터 음악은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국악도 마찬가지다. 음 하나하나에 감정이 담겨있다. 그 음 하나를 잘 다듬고 조각해서 내놓는다. 그런 작업들은 대회나 공연 준비 같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집중적으로 단련된다.


이번 대회는 직장인이던 시절과 다르게 절반은 내가 자처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번 기회에 김죽파류 가야금 진양조 성음을 제대로 내보고 싶어요 선생님, 이라고 말했으니. 매주 돌아오는 레슨시간에 배운 것을 집에서도 연습했다. 선생님 앞에서는 분명 알겠던 것이 부랴부랴 집에 와서 해보니 그 느낌이 살지 않았다. 잘못된 음과 박자로 제멋대로 연습하다 굳어지면 교정하는 게 더 힘이 든다. 그러니 대회를 준비하는 기간은 집중력을 바짝 올려야 한다. 한마디도 한 음도 놓치지 말고 기억해 뒀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복습한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그 부분을 반복한다. 대회 준비 후반이 되면 핸드폰으로 녹음 앱을 켜놓고 연습한다. 아무리 연습하고 경험이 쌓여도 무대가 어려운 건 여전하다. 그나마 공연일 때는 나를 지켜보는 기대 어린 눈빛을 상상하니, 한껏 기분이 좋아지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대회일 때는 그래, 어디 얼마나 잘 타는지 한번 보자 라는 무거운 기운이 두 어깨를 누른다. 그러니 그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 무대를 상상하고 혹시 중간에 실수를 하더라도 멈추지 말고 쭉 타본다. 녹음해서 들어보고 어디가 미숙한지를 객관화해서 살펴본다. 그건 녹음된 내 목소리가 여간 어색하지 않아 당장 중지 버튼을 누르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준비가 된 만큼 덜 긴장된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가슴에 번호표를 붙이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게 느껴지고 손발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니 긴장이 안 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준비를 한 만큼 잘하는 부분과 약한 부분을 이해하고 있고, 약한 부분 또한 의연하게 넘길 연습이 되어있다면 불안감이 덜하다. 불안은 예측할 수 없을 때 시작되니까. 내 연주가 어떨 것인지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상이 된다면, 불안은 덜하다. 그제야 이런 말이 가능해진다. 이젠 하늘의 뜻이다.


해가 뜨기 전 새벽공기를 가르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아니 해가 떴었던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가야금을 들고 버스에 몸을 실었던 기억이, 대회가 끝나고 다시 돌아온 밤의 기억과 겹쳐져 무엇이 어떤 기억인지 흐릿해져 버렸다. 돌아와 마찬가지로 깜깜해진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집으로 오는 길은 늦은 밤인지 이른 새벽인지, 잠들기 전의 피곤함인지 잠이 깨지 않은 몽롱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도로를 밝히는 가로등과 여전히 밝게 켜져 있는 가게 조명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들, 대회가 열린 경주 육부촌 공연장에서 있었던 정신없었던 한나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어스름한 조명들에 감춰져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시간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건 가방에 들어있는 상장이 증명하고 있었다. 꿈인 듯 생시인 듯 희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조심히 밤 도로를 갈랐다. 집에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우니 어제 일어난 시간보다 두 시간이 빨랐다. 한 달가량의 노력을 쏟아부은 23시간. 날 좋은 가을 주말을 반납하고 만든 작은 성과. 쉬이 잠이 들지 않는 경직된 피곤함. 그게 뭔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약간의 기분 좋음 그리고 아쉬움. 옅은 한숨과 함께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이다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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