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과 2막 사이 인터미션 시간을 보내며
내일 가장 최근에 다녔던 회사 송년회가 있다.
퇴사자들의 송년회이니 나도 참석 대상이다.
SNS 커뮤니티에서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날짜와 장소를 정하는 투표가 올라왔다.
그 SNS는 해킹당해서 로그인이 어려운 상태였고,
다만 새로운 글이나 댓글, 상태 변경등의 소식이
연결된 이메일로 쉬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다.
들어가지도 못할 SNS 소식을 찔끔거리며 보는 건,
넷플릭스 영화의 예고편만 보고
본편을 못 보는 것보다는 좀 덜 힘들고
제목만 보고 클릭했다가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가십 기사보다는 덜 자극적이었다.
갈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 그 고민도 이내 그만두었다.
그 업계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맥주 한잔, 와인 한잔을 찰랑거리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요 라는
나는 누구인가를 표현할 한마디를 찾지 못했다.
아직 어딘가를 헤매며 부지런히 찾고 있는 내 이야기를
인내심을 갖고 들어줄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있다 해도 그를 신뢰하고 터놓을 생각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파티란 늘 그런 거니까.
그곳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힘든 직장 생활이라고는 해도,
퇴사해서 나온 이곳은 사막이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새장을 막 탈출한 나는
어디서 먹이를 찾아야 할지,
비는 어디서 피해야 할지,
해가 지면 어디에서 안락한 잠을 이룰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막연하여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감이 없었다.
지금이라고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는다면,
느리더라도 방법을 찾고 도달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생겼다.
회사가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길이라
불안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더 안심이 되었다.
그러니 달콤한 꿀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기 위해
이제는 달라져버린 과거의 내가 그리워
지금을 후회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써 모은 작은 마음들이 충격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
두 손안에 모아 등을 둥글게 굽혀 가슴 안에 품었다.
배수진을 치고 등을 돌렸다.
*
무방비 상태인 너의 등을 좋아한다.
적당히 구부정한 등,
반듯하게 편 어깨와 목,
집중하느라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
네가 보여주는 등은 안전하다.
무얼 하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네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슬픔에 잠겨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지,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기쁨이 흘러넘치는지,
평안한 고독 안에서 너를 찾고 있는지,
너의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다.
나는 너를 보지만, 너는 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이래라저래라 요구도 없고
왜 이렇게 살았니 책망도 없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도 없다.
그저 손을 뻗어 등에 흐를 온기를 느껴보고 싶어진다.
그러면 너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다
나를 발견하고 웃어주겠지.
너를 당당히 훔쳐보는 시간
상상과 기대감으로 잠시 설레는 시간
그 시간을 허락해 준 너의 뒷모습
**
등을 돌렸다는 말은
내 앞에 내 가슴 안에 품은 것을
들여다볼 시간을 허락해 달라는 말.
작은 새끼고양이를 가슴에 품듯
이제 막 올라온 새싹에
투명한 페트병을 반 잘라 씌워 보호막을 만들 듯
가슴에 품은 작은 꿈을 키워볼 시간을 달라는 말.
그러니 너에게 등을 돌렸어도
조금 후 돌아보고 웃어줄 나를 상상하며
그 짧은 시간을 허락해 달라는 부탁.
***
파티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페트병 안에 숨은 작은 새싹은
아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요한 내 등을 툭 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돌아보고 웃으며 반겨줄 생각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작은 새싹들을
애지중지 보여줄 테다.
나는 이렇게 약하고 작지만 새로 시작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