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가 어려울 때
“너는 메타인지가 뛰어나구나?”
지인의 어설픈 칭찬을 두 손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자기는 그런 것에 약하다고 했더니
이내 돌아오는 말이었다.
칭찬을 주었다가
겸손으로 포장한 소박한 말과 손짓에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이 오가는 현장에
방관자가 되어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 메타인지.
그건 어떻게 생기는 걸까?
아니 그전에 메타인지, 그것 있으면 좋은 걸까?
*
나는 할 수 있다,
꾸준히 될 때까지 하면 된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다,
아무튼 된다고 강요하듯 가르치듯
숨은 가능성을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들이
인터넷과 서점에 차고 넘친다.
조금의 성실함과 인내심을 추가하면
원하는 성공을 잡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이 흘러넘친다.
그러다
노력이 부족한가,
사회는 왜 내 능력을 알아봐 주지 않는가,
같은 버거운 생각과 의심이 뭉글뭉글 생기기 시작하면,
쉬어도 된다,
그만두는 것도 용기 있는 선택이다,
나를 위로하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라,
안 해도 괜찮다는 몽글몽글한 말들이
추천알고리즘과 맞아 매일 눈앞을 지나간다.
**
숨은 가능성이 무엇인지,
가능성이라 알았던 것이 알고 보면 착각인지,
메타인지라는 게 있다면
인생은 시행착오 없이
덜 피곤하고 더 간단해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다.
나는 내 목소리를 뼈의 진동을 통해 듣는다.
그러나 너는 입 밖으로 빠져나간 내 목소리를
귀 고막을 통해 듣는다.
나의 모습은
거울을 통해 카메라 렌즈를 통해 확인할 뿐
내 몸에서 눈과 신경세포와 뇌를 따로 떼어내
나라는 사람을 바라볼 수는 없으니
진짜 나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곁에 있는 너를 통해 나를 보고 듣는 것.
그러나 네 앞에 있는 나의 모습 또한
머리에서 가슴에서
뼈와 내장과 심지어 피부에서
어쩌면 긴 시간, 혹은 인지하기 힘든 찰나
잠시의 주춤거림을 거쳐
걸러지거나 증폭되어 드러난 것이어서
진짜 내 모습은 아니다.
혹시 진실에 가까운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걸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내 비좁은 마음 때문에
나는 내 진짜 모습을
스스로도 너를 통해서도 영원히 볼 수 없다.
***
제가 잘하고 있나요?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인정욕구보다는
메타인지 부족으로 시작된 의심과 불안.
새 일을 시작해도 될까요?
대운, 삼재는 언제인가요?
불안에서 시작된 갈증은 끝이 없다.
산책을 하다,
약속 장소를 찾아가다,
여행을 하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나를 찍어본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의미를 찾고 해석을 했던 것처럼,
혹시 메타인지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럼 인생을 더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리석은 바람으로 농담같이 셔터를 누른다.
거기엔 네가 알려준 나보다
진실을 더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그림자는 다만
꽃밭에서 파도 위에서 흙 위에서 물 위에서
그게 어디든
미끈하고 울퉁불퉁하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표면을
이미 내 것 인양 받아들여 한 몸이 되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낯선 공간을 점령한다.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대신 너에게 땅에 하늘에 물에 바람에 나무에 투영된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