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그날 이후
깜깜한 도로 위 가끔씩 지나가는 차소리와
맞은편 오피스텔에 켜진 불 외엔
암막커튼으로 온 세상을 덮어버리듯
임의로 시각과 청각을 막아 자극을 서서히 차단한다.
나를 위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알람을 끄고 SNS의 유혹을 이겨내며
따뜻한 루이보스 차를 한잔 가져와
낮부터 읽으려고 생각했던 책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카톡 알림에 잠시 고민했다. 어쩌지.
혹시 긴급한 일일지도
소중한 사람의 외로운 외침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카톡에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기사가 공유되어 있었고,
나는 그게 만우절 장난이거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나만 모르는 밈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러다 포털에 속보라고 올라오고 있는 기사를 보았다.
왜 그런지 전혀 알 수 없는
친절한 설명이라고는 일도 찾아볼 수 없는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속보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의 우상,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장국영이 생각났다.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저 루이보스 차처럼
손끝에 전해지지 않은 80도의 따끈한 온도처럼
눈으로는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닿을 수 없는 생경한 감각은
텔레비전과 인터넷 너머로 허기와 갈증을 만들어냈다.
시멘트바닥을 파고 있는 강아지처럼
절대 나올 리 없는 진실을 손끝으로 두들겨 팠다.
하지만 철과 알루미늄, 플라스틱이 조합된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저 검은 화면은
나와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의 갈증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신청한 대출이 막힐까 봐 걱정했고
매일 먹는 약을 병원에서 타지 못할까 봐 불안했고
당장 인터넷이 막히고 언론사가 장악될까 봐 두려웠고
은행과 슈퍼가 문을 닫을까 봐 편의점으로 향했다.
소설에서 다큐멘터리에서 역사서에서만 접했던
계엄령이란 단어가 도대체 무엇인지 생경했던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지
무엇을 믿고 믿지 않아야 할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지탱할
무너진 상식과 인간에 대한 믿음 앞에
갈팡질팡 길을 잃었다.
토요일 여의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차가운 바람을 뚫고 서강대교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기대했을 사람들을 보며
아무 일 없이 지루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나른한 고양이의 기지개처럼 하품 나오는 풍경이
알고 보면 치열한 고민과 성실한 노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이었다는 걸
차가운 강바람에 비로소 깨달았다.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 일상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은
그럼에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보며
조금은 근거 있는 믿음이랄까 희망이랄까
가느다란 촛불심지가 되었다가,
뉴스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존경받지 못할 발언들과 행동들을 보며
찬물을 끼얹듯 사그라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따뜻한 거실에서 함께 한 해를 돌아보고,
푸릇푸릇 돋아나는 연녹색 이파리들을
어린아이 볼을 쓰다듬듯 손끝으로 만져보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달아난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 얼음을 아삭아삭 씹어먹고,
다시 붉은색 노란색 물든 산을 친구들과
물 한병 초콜릿 한 조각 나눠먹으며 오르다,
검은 커튼이 오늘의 공연이 끝났음을 알리며 내려올 때
따뜻한 차 한잔에 책 한 권을 볼 수 있던
지극히 평범해서 꿈조차 꾸지 않았던
그 일상을 다시 꿈꿔본다.
꿈꾸는 그 일상을 되돌리기 위해
안이하게 그것들을 바라보고 당연한 듯 누렸던
배부른 돼지였던 나를 반성한다.
여의도에 흐르던 날카로운 겨울바람처럼
치열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숨은 게으름뱅이를 흔들어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