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백양사에서의 하루
좌우로 길게 뻗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달려드는 날파리들을 손수건으로 쫓아댔다.
함부로 손바닥을 이리저리 쳐서 다치게 할 생각도
그렇다고 욍욍거리는 소리를 무심히 흘릴 여유도 없었다.
그들의 영역에 허락 없이 들어왔으니
조용히 가고 싶은 곳까지 걸어가다,
이마와 코에 땀이 조금 맺힐 때 즈음
생각의 찌꺼기들을 거친 숨과 함께 뱉어내고
산을 잠시 내려다보며 세상 너머의 세상을 훔쳐볼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시지프스의 반성과 위안을 함께 안고
기다리는 현실로 터벅터벅 돌아올 생각이었다.
성가신 날파리와 모기들에
기대한 명상을 가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건을 이리저리 흔드는 것에 지쳐갈 때쯤
어쩌다 오른쪽 뒤로 고개를 돌렸다가
키 큰 나무사이로 기다란 기사의 검 같은 햇빛이
숲 깊은 바닥까지 쑥 꽂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검이 하늘에서 어두운 숲을 가르며 내려왔고
눈치채지 못한 뿌연 안개가
둘러서서 그것의 행렬을 반기고 있었다.
기다란 태양의 검이 닿은 그곳에는
키 작은 이름 모를 풀들이 흙을 덮고 있었고
커다란 바위 위에는 소원을 담은 돌인형들이
무릎 꿇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어 숨을 죽였다.
공기 중에 날아오르는 나무와 풀과 돌과 흙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아침 산책을 끝내고 돌아온 사찰은
거대한 영웅에 기대어
어제는 몰랐던 담대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 안개를 이불처럼 덮은 거인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 나른한 하품을 하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성큼 그 안에 발을 들이게 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과 작은 등불.
올려다봐야 보이는 낡아 색이 벗겨진 단청.
여름내 태양을 반기다 노랗게 빨갛게 변해버린 잉어와
경내 유일해 보이는 인공물인 분수가 만들어내는 연못의 주름.
간장과 된장이 담긴 항아리 단지는 산에서 만난 도토리를 닮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은
소원을 담은 돌인형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은 뜨거운 태양이 기운을 발하지 못하는 아침 시간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절을 가득 메운 고요,
그 정적을 깨고 공기를 가르는 사람들,
낡은 것들과 생기 넘치는 것들,
작고 평범한 장면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대단할 것 없는 눈앞의 풍경을
사색의 눈으로 바라본다.
***
느린 숨과 정적,
따뜻한 햇살과 나른하게 흐르는 시간이 필요할 때가 되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대단할 것 없었던 그때의 풍경을 떠올린다.
들숨에 시간 사이 숨은 틈을 만들고
날숨에 세상 너머 세상을 꿈꾼다.
그러다 어느덧 어둑해진 회환의 시간에
괜찮다 괜찮다 어깨를 도닥이고 머리를 쓰다듬고 귓불을 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