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이 말을 걸어올 때
친구의 이사를 도와준다며
어색하게 거실 한복판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사모님~ 이 가구는 어디에 둘까요?
사모님~ 이 짐들은 어디에 풀까요?
친구가 그려준 가구배치도를 보며
여기 두세요, 저기 넣어주세요.
거실과 방, 주방을 오가며 어설프게 여기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결혼도 안 하고 남편도 없는데
왜 자꾸 사모라고 부르나, 불편해졌다.
오늘 하루 만나는 고객(의 친구)과 이삿짐센터 직원은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인사를 나눌 틈도
통성명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으니 자연스레
여자는 사모님, 남자는 사장님이 되어버렸다.
관계를 더 진전시키고 싶지 않은 사이에선
조금 과한 친절과 높임이 섞인 호칭과 말이 오간다.
쓸데없는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은
피로한 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선택하는
적당한 거리와 표면적인 존중이 만들어진
묘한 불편함이다.
그러다
세탁기와 수전의 연결 장치가 맞지 않다는 말에
철물점 내가 다녀올게!라는 말과 함께
드디어 할 일을 찾았다는 기쁨과
이곳을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자신이 가겠다는 친구를 두 손으로 만류하고
집을 나왔다.
주말 아침의 조용한 도시 아파트촌은
큰길에는 한가로이 차들이 지나가고
중요한 외출인 듯 한껏 꾸민 사람들과
까치머리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동네주민,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학생들과
둘셋 무리지어 골목을 뛰고 있는 러닝크루들이
꽉 찬 고요를 뚫고 지나가며 잔잔한 파장을 만들었다.
곧 다가올 한낮의 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넘치는 집안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눈빛과 고갯짓이 자유로웠고
발바닥이 간질거려 걸음이 가벼워졌다.
철물점을 찾아 들어간 골목은
어젯밤 화려했던 유흥이 언제 있었냐는 듯
램프 안에 숨어버린 요정 지니처럼 침묵했다.
그럼에도 지니가 두고 간 술병과 화려했을 간판들은
유흥을 마무리하는 성실한 사장님의 손길이 닿아
가지런히 줄을 서서 가게 안에 들어가기를 기다리거나
나 같은 행인을 구경하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그들을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영역에 침범해 주말 아침잠을 깨운 이방인을
내려다보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조용한 공기 속에 속닥속닥 거리는 그 말이
혹시라도 렌즈 끝에 닿을까
조용히 카메라를 꺼내 사진에 담는다.
셔터를 누르고 필름을 감는 소리마저 미안해진다.
**
그런 물건들을 만나는 순간은 도처에 널려있다.
휴게소 화장실 앞 공간을 가득 메운
수십 개의 모자 쓴 마네킹 머리들과 마주쳤을 때,
사람을 닮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가
한 곳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었다.
갤러리 한구석 햇빛 아래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든
파란 이끼들은 너무 빨리 자라 통안에 갖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햇빛을 보니 더욱 탈출하고 싶어 꾸물거리는
그래서 상자를 들썩이는 왕성한 생명력의 이끼들이
와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수리중이던 빌딩의 3층과 4층사이에는
벤치 하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여기 앉았다 가세요라고 소심하게 말을 걸었다.
약속 시간 때문에 서둘러 가다 문득 돌아보니
물끄러미 내 모습을 쳐다보던 벤치와 눈이 마주쳤다.
생김도 모양도 높이도 심지어 소재까지 제각각이던
화가 작업실의 의자들과
작업실 한편에 모여있던 술병과 붓들은
낯선 방문객들에게 어리둥절해하다,
이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끼리의 잡담을 이어갔다.
길을 가다 발에 차이는 낙엽을 보다
그 낙엽을 떨어뜨린 가로수를 올려다보다
그 옆에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다
그 비둘기가 내려앉은 전봇대 전선을 보다
그 아래 서있는 쓰레기통을 보다
시선이 닿는 곳에 안녕 여러분 인사를 건넨다.
내가 그들을 발견한 것 같지만,
때로는 그들이 나를 부르기도 한다
저기요, 여보세요. 뭐가 그리 바빠요?
지나가는 사람, 그래요 당신.
이야기 좀 나누다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