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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Nov 28. 2024

동네 산책

천천히 보며 특별한 풍경을 발견한다

오래된 동네를 산책했다.

오층을 넘지 않는 연립주택과

삼층을 넘지 않는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이

제각각 좁은 골목을 만들고 있었고

갑자기 길이 뚝 끊어져 돌아나와야하는

기역자 모양의 골목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그저 방향만 생각하고 걸어가다가는

계획한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기 십상이었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다 평지에 다다르자

왼쪽으로는 세월에 바래진 하얀 종이처럼 누런 빌라와

오른쪽으로는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이 보였다.

벽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칠해진 페인트 자국이

앙상한 나무가지 추상화처럼 그려져있었고,

벽돌로 올려진 담장 아래 무너진듯한 구멍은

알고보니 동네 길고양이를 위한 보금자리였다.

그 안에는 사료와 물이 가득가득 담겨있었다.

그걸보자 이 동네에서 집사로 간택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 건물 아래 천장이 낮은 반지하같은 공간은

알고보니 차고여서 몸집 큰 SUV는 어럽겠지만

승용차는 꼭 맞춘듯 쏙 들어가

박스안에 몸을 숨기고 코끝과 발끝만 나와있는

검은 고양이가 연상되었다.


약간 낯선듯한 풍경은

엘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시계를 보는 토끼를 따라가는,

그럴만큼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두리번거리다 사진기를 가방에서 꺼내 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왼쪽 작은 골목으로 몸을 돌리니,

건조한 공기의 좋은 볕에 말라가는 빨래가 널려있었다.

꽤 쌀쌀한 날씨여서

젖은 빨래에 앉은 빛은

그만큼이나 차갑고 무거워보였다.

봄이나 여름 한낮의 햇빛처럼

옷 안에 스며있을 옅은 세제 향을 머금은 물방울들을

단숨에 날려버리겠다라는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깨가 무거워 조금 구부정해진 어른처럼

담담히 묵직하게 서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여름 나무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아있던

북한산 등산로 입구의 어르신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골목을 들어오는 차를 피해 한쪽 벽에 바짝 붙어섰다.

그리고 몇걸음 더 나가자

양방향 차가 다닐 수 있는 꽤 큰 거리가 나타났다.

좀 전에 지나온 골목과는 달리

옷집과 철물점, 무당집, 분식점, 치킨집이 보였다.

"방금 동남아 10개국을 순회하고 돌아온~" 이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사실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은 가수를 소개하는

다소 촌스러운 듯한, 그러나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그러다 지금까지 본 골목의

오래된 빌라와 주택, 녹슨 간판의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건물의 교회와 절을 발견했다.

왠지 사이가 좋지 않은 덩치 큰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서로 어깨가 밀리지 않게 팽팽하게 긴장하고

팔장을 낀채로 카메라를 노려보는 것 같아

사진을 찍다말고 풋 하고 웃어버렸다.

서로 다른 종교가 담벼락도 없이 딱 붙어

입구를 반반 나눠쓰고 있는 모양새가

지금까지 본 골목보다 더 생경해 한참을 서성였다.

교회문을 열고, 아니면 절 문을 열고

실례합니다~ 라고 들어가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또 그러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혹시 사이가 굉장히 좋은 이웃사촌일지도 몰라.

아니 실은 하나의 땅을 물려받은 형제가

각자 목사님이 되고 스님이 되었는지도 몰라.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다

4차선 도로를 만나

짧았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여행은 끝을 맺었다.


어떤 날은 뭘 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허둥지둥 지나간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점묘화를 그리듯,

건물을 고양이를 물건을 간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응시한다.

시선의 끝이 움직이는 것을 인지하며 눈과 얼굴을 움직인다.

그런 날은 평범한 곳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별것 아닌 산책에서 여행을 발견한다.


그 발견이 꽤나 즐거웠는지

나도 모르게 어린시절 좋아하던

토토로 애니메이션 OST 한구절이 생각나 흥얼거렸다.

아루코(步こう) 아루코(步こう) 아타시와겡끼(わたしは元氣)

 걸어요 걸어요 나는 건강해요

아루크노 다이스키(步くの大好き) 돈돈 이코오(どんどん行こう)

 걷는것을 많이 좋아해요 계속해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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