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꽃이네요. 활짝 피어난 화려한 꽃.
예술가군요. 가슴속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데,
틀 안에 갇혀있어요. 이런.. 그러니 답답하지.
직장생활을 어떻게 그리 오래 했죠?
가야금 배운다고 했죠?
그거라도 안 했으면 가슴에 열불 났을지도.
글 쓰는 것 좋아요. 예술가라니깐.
그렇지만 대성은 아니고요."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듣더니
엄지손가락 끝으로 검지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듯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니,
타고난 기질은 어떤지, 아쉬운 점과 장점은 무엇인지,
재물운과 연인운은 어떤지,
양파 껍질을 까듯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졌다.
나는 일본 여행에서 갔던
절에서 본 운세자판기에서 뽑은 종이를 보듯
그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놓칠까 봐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귀를 쫑긋 세웠다.
사주팔자는 통계라고
타고난 기질로 방향을 알아가는 거라고
방향과 하는 것이 일치하면 순풍을 달고 잘 갈 것이고
같은 일도 기질에 따라 때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게 다르다고
돈, 명예, 사랑과 일, 기질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거니
내 미래도 결국 내가 만드는 거라고.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이왕이면 재물운도 더 있으면 좋겠고
귀인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즈음에 나타나면 좋겠고
하는 일이 대성해서 명예도 높아지면 좋겠고
크게 고민 안 하고 수월하게 살고 싶고.
원하는 건 산더미인데
내 기질이 이래서, 내 그릇이 요만해서
대성은 아니라는 말에
그냥 고만고만하게 살아간다는 말에
만족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 분과 헤어지는 지하철역에서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달까,
아까 말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걸까,
지하철 3대를 보내는 시간만큼 더 붙들어
인생상담과 고민 같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기질이 정해져서 방향이 정해진 거면,
우리는 어쩌면 거대한 지구를 구성하는
한낱 작은 세포 같은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20년을 직장인으로 군말 없이 지내다가
그 이후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소소하게 살아가는 세포인 거다.
그리고 나 같은 수많은 지구상의 세포 - 인간과 동물, 식물, 생명체와 비생명체 - 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맞는 역할들을 해내야 하니,
그 역할에 맞는 기질을 갖고 생겨나고,
그에 맞는 한계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타고난 사주를 뛰어넘어
엄청 멋진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흡사 뇌세포가 되고 싶었지만
간세포로 생겨난 어떤 세포의 욕망 같은 것은 아닐까.
가령 내 몸의 어떤 적혈구는
백혈구가 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고,
어떤 피부세포는 뼈가 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고,
어떤 망막세포는 심장 세포가 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는 운명.
그러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봤던 작품들이 생각났다.
얼핏 보면 철로 된 주전자 같지만 사실은 종이라거나,
유리로 만든 병과 그릇 같지만 알고 보면 비누라거나.
작품만 봐선 예측이 어려운 재료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종이를 벗어난 종이,
비누를 넘어선 비누에게 자꾸 눈길이 갔었다.
재료에 주어진 본질을 넘어선 시도에
그저 반전이 주는 신기함을 넘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니 좀 더 해봐야겠다.
다른 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정작 자신은 거품으로 사라지는 가여운 비누가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어
미술관에 작품으로 전시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커피 한잔이 다 식어갈 시간 동안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사주팔자 풀이를 들었지만
결국 어떻게 살지는 내 맘이지.
마흔 넘어 뒤늦은 사춘기를 진하게 겪고 있어 그런지,
나를 속속들이 아는 것 같은
신기한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지만
반항하는 마음도 조금 올라와버렸다.
두고 봐, 틀을 깨고야 말겠어.라는 마음이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