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금 양보하면 별 문제없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다.
점심에 국밥을 먹을지 파스타를 먹을지,
주말에 집에서 쉴지 친구를 만날지,
여행지에서 마사지를 받을지 공항으로 갈지,
연말 평가에서 내 성과를 자기 거라고 포장해도 될지.
*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데로 행동하는 아이였다.
이를테면
수업시간에 손들고 질문하거나
점심시간에 좋아하는 사람과 도시락을 함께 먹거나
잘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그런 것들.
남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재수 없는 애'라는 꼬리표가 달려버렸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기분을 거슬리게 했고,
그게 피해를 준거라고 주장한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눈치가 없어 그 꼬리표도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없는 눈치도 연습하면 만들 수 있을까.
부지런히 다른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
낄끼빠빠를 연구했지만
사회초년생 시절의 결과는 참담했다.
첫 직장 새로 옮긴 팀 과장에게서
눈치가 그리 없냐고 골방에 끌려가 한참 혼이 났었다.
알고 보니 팀장님이 내가 원래 있던 파트가 아닌
다른 파트원만 챙겨 회식을 했다가 곤란해졌다는 게
알고 보니 그 이야기가 나한테서 흘러나갔다는 게
내가 혼이 난 이유였다.
재수 없는 애가 아니기 위해
눈치 없어 혼나는 일을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뭐든 괜찮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괜찮아'라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다.
결심한 적은 없었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나는 괜찮아. 네가 원하는 데로 해.
그럼, 입속에 숨어있던 아주 작은 내가
아니야 그건 아니야라고 작게 중얼거렸었는데,
어느새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만큼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다면,
지금쯤이면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닌 거 보니
괜찮아라는 말과 괜찮은 사람과는 상관관계가 없는 듯.
*
내가 널 얼마나 배려했는데.
내 호의가 내 애정이 너에게는 당연한 거니.
나만 참았지. 맨날 나만 참은 거지.
공기 중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말은
날카로운 유리 칼날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며
너와 나의 가슴을 찔렀다.
바닥에 부딪치고 흩어져 햇빛에 반짝이는 유리 가루가
잔잔한 한낮의 바다 윤슬 같아 보이는 나른함과 두통.
너를 향한 원망의 말이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꾹꾹 눌러
작고 작은 내 속의 아이 입을 막고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만 입다물면 모두가 괜찮을 거야.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믿음이
틀렸다는 깨달음의 절규였다.
나는 나를 도려내고 지우고 외면하고
그게 너를 위한 것이라 착각하며
결국 너를 나처럼 상처 내고 지우고 외면했다.
그건 괜찮아 라는 거짓말에서 시작한 잘못된 결말
사랑받고 싶은 욕망에 저지른 실수
*
나는 이제 괜찮지 않다.
국밥보다는 샐러드가 좋고
네 유흥보다 내 휴식이 더 중요해졌다.
내 성과는 내 것이고
속으로 삭여 입을 틀어막은 아이를 구할 것이다.
다시 재수 없는 애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참거나 양보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 욕망을 직시하고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질 것이다.
선혈이 낭자하게 다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아버렸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