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을 읽고
나는 매일 작별을 고한다. 의식하고 고한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날은 의식하지 않고 고별하고 만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것들과 작별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십 대가 되자 더 이상 밤을 새우면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활기찬 무리에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고, 혼자의 시간이 필요해졌고, 하루 일곱 시간은 자야 하는 몸이 되었다. 날것의 감정과 감각으로 매일 생채기 내며 들끓는 생명력이 용암처럼 뿜어져 나오고 다음날이면 다시 멀쩡해지던 젊은 시간과는 작별하게 된 셈이었다. 늘 그렇다. 오늘은 어제와는 좀 다르다. 오늘 나는 어제보다 일찍 일어났고, 기침과 열과 가래는 좀 덜해졌으니 조금 나아진 셈이다. 어제의 감기인지 독감인지 나를 괴롭히던 것과 비록 아주 느리지만 작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작별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의 헤어짐 뿐만 아니라 달라져버린 과거와의 이별이기도 하며,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가 만들어내는 달라짐의 경계이기도 하다. '작별이란 도대체 뭘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 이 생각의 도돌이표는 한강의 단편 <작별>을 읽으며 시작되었다. 그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신체의 변화는 곧이어 인간이기에 영위했던 모든 관계와 일상과 작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유도 알 수 없지만 우리 인생이 늘 그렇지 않은가. 왜 하필 나인지에 대한 설명은 누구도 해주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고, 이제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첫 문장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첫 문장인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을 연상시켰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자신이 변화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전의 자신과 작별하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작가의 서로 다른 생각 혹은 감각이 녹여있었다. 이 소설덕에 <변신>이라는 소설을 작별이라는 관점으로도 생각하게 되어 좋았다.
나라면 그 변화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이내 녹아 사라질 것에 대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왜 하필 내가 눈사람이 된 거지?라는 분노에 사로잡혀 너무 긴 시간을 허비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눈사람이 되는 이유 같은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을 갈 수도, 몸 상태를 점검하러 의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으니, 그저 머리 안에서 허황한 질문과 대답이 전쟁터 포환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겠지. 그러다 어느새 밤이 되어버리고 뒤늦게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설픈 작별인사를 부랴부랴 나누게 되겠지. 그러니 눈사람이 되었는데도 크게 놀라지 않고 차분한 그녀는 설마 이 시간을 기다린 것일까 싶을 정도로 담담하고 현명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냉장고에는 그녀가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간단한 유언장이 붙어있었다.
그녀가 눈이 되고 그게 녹아 물이 되거나 얼음이 되어 현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아니 존재가 아니라 사라지고 없을 때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미련은 그녀의 아들일 게다. 그런 아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서 하는 일은 꽉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도 아니고, 담담한 끝말잇기였다. 그냥 시간 때우기 정도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밥 먹고 무료한 시간 중에 누워서 잠들지 않을 때 서로를 달래며 할 수 있는 작은 놀이. 그 놀이를 하며 '바깥에서부터 다시 얼어붙어준다면, 어쩌면 이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을 다잡는 장면은 별것 아닌 일상을 동아줄처럼 부여잡고 절벽에서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처럼 느껴져 더 가슴이 아팠다. 아마 그곳은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더운물이 고여 녹아내리는 늑골 아래 정도일 거다.
그녀는 경계의 사람이었고, 결국 인간과 인간이 아닌 그 중간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서도 의문이 들었던 지점이었다. 동호의 친구 정대가 죽은 후 영혼이 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를 보며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그 장면.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 인간이 아닌 거지. 그걸 알 수 없는 정대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었던, 그러니까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들을 되새김질했다. 이 책의 그녀도 삶과 죽음,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인간이었던 시절을 작별해야 할지를 궁금해한다. 그러다 손가락이 부스러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눈썹이 녹아내려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서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무엇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아봤을까. 그녀의 아들일까, 눈사람이 되기 전 그녀의 모습이었을까. 그 장면은 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보아서 결국 돌이 되었다는 여인 이야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눈사람이었던 그녀는 무엇이 되었을까? 아니면 무엇을 발견했을까?
정대가 죽은 후에도 기억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신체가 녹아 물이 되고 다시 얼음이 되어도 어디선가 그녀의 기억은 남아 그녀의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았던 순수하게 밝았던 그 추억을 되새김질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밤새 차가운 눈이 내리고 바깥부터 얼어붙어 눈사람인 채로 하루를 더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모르지 마법 같은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볼아본 그때 다시 인간이 되었을지도.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쓰고 사적인 삶 마저 부스러지기 시작했을 때 이 단편을 썼다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이야기했다. 삶과 죽음이 혼재하고 인간의 폭력성에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책을 쓰고 거기서 벗어나 다시 일상을 찾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겨우 책 한 권으로 그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그럼에도 이 책들이 많이 읽히고 세상에 알려져서 수많은 동호와 정대가 다시 우리 가슴과 머리 안에 살아나길 얼마나 빌었을까.
'그리 갈게,라고 말한 뒤 아이가 전화를 끊는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허공에서 흩어져 내려오는 것, 말할 수 없이 친근하고 아름다운 것, 수천 올의 속눈썹처럼 작고 가벼운 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설에서 눈은 곧 녹아 없어질 존재이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친근하고 안도감을 주는 결속력 있는 강하고도 약한 것으로 표현이 된다. 그녀의 지금 모습을 좀 더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그녀의 몸을 구성한 것. 그녀가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것. 그러나 동시에 아스팔트에 길 위, 얼굴 위에 내려앉아마자 물이 되어 사라질 것. 부피감도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연약하고 여린 것. 그건 갑작스럽게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곧 사라질 위기에서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는 약자, 눈사람이 된 그녀와 같은 존재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그 후 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한다.
슬프고 담담하고 아름다운 짧은 이야기. 한강작가의 글이라는 걸 알고 읽어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봤기 때문에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인간이었던 시절과의 안녕을 고하는 시간을 찬찬히 들여보게 만들며, 만일 나에게 이런 사고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별을 준비할 것인지까지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을 덮고 다시 생각해 보면 동화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게 한강 작가의 글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자 평>
존재와 죽음,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 아닌가. 보이는 것이 달라질 때인가, 생각이 달라질 때 인가,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이후인가. 경계에 대한 작가의 질문은 긴 여운을 남긴다. 경계 사이 작별하는 시간마저도 슬픔을 넘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