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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Oct 25. 2023

정지용의 <장수산 1>

-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솔직히 말해 이 시는 교실 현장에서 가르치기 어렵다. 이 시는 정말이지 10분간의 적막이 필요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이 시를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아이들은 모두 잠들고 만다. 그렇다고 이 시를 방방 뜨면서 "예쁘게 밑줄 쫙~ 별표 두 개!" 하며 설명하면 이 시 고유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없다. 요즘은 쓰지 않는 낯선 단어들도 진입 장벽에 해당한다.


장수산 1 / 정지용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름드리 큰 솔이 베어짐 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아이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뭔 소리야?"

나는 대답한다. 아이들이 지루할 틈이 없도록. 틈을 보이면 안 된다. 

"숲이 고요하대. 소나무가 엄청 멋지대. 밤에 눈도 오고 달도 떠서 환하니 좋대. 웃절 중이랑 장기를 여섯 판 했는데 자기가 여섯 번 다 이겼대. 그런데 여섯 번 지고서도 바보처럼 웃고 올라가는 스님이 뭔가 좀, 멋지더래. 엄청 힘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좀 힘든 마음이 가라앉더래. 그래서 견딜 힘이 좀 생겼대. 장수산에서 지냈던 것이. 이때가 일제강점기였으니까 좀 힘들었을 거야."

나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나서

"그거 알아? 정지용 하면 다양한 이미지로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는 이미지즘으로 유명한 거? 이 시도 장난 아냐. 청각, 시각, 촉각, 후각 다 있어. 지금부터 5분 줄 테니까 싹 다 찾아!"

이렇게 애들을 볶다가 교실을 나온다. 아이들은 불만이 없다. 거기에서 시험이 나오니까...


하지만 내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떤 아이는 이 시의 매력을 느낄 것을. 그 애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렇게 멋진 시를 저렇게밖에 설명을 못한다고? 참 선생 하고는...'


"이 사람은 슬프고 꿈이 좌절되어 장수산에 숨어들었던 것 같아. 숲은 무진장 고요해서 그 고요가 뼈에 스며드는 것 같았어. 밤이 되었는데 내린 눈에 달빛이 비쳐 골짜기는 종이보다도 하얗더래. 이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 바로 위에는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절 중이랑 뭔가를 두었대. 여섯 판을 두었다고 하니 바둑은 아니겠다. 그렇다면 장기일 테지. 여섯 판에 여섯 번을 모두 그 중이 졌다네. 그런데 그 스님이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웃고 올라갔어. 그 스님에 대해 뭐라고 썼어? '조찰히 늙은 사나이'라고 썼잖아. '조찰히'는 '깨끗이'라는 뜻이야. 이 사람은 스님의 그런 태도에서 무념무상 무욕의 세계를 느껴. 이 시가 1939년에 발표되었으니 일제강점기였잖다. 아무리 정지용이 저항적 기질이 아니라 해도 힘들고 지쳤을 거야. 시인은 예민한 사람들이니까. 그런 시인이 장수산에 깃들어 지내는 동안 무너진 가슴뼈가 차츰 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거야. 상처받은 짐승이 숲에 숨어들어 치유하듯이. 어디서 그걸 느낄 수 있어?"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그렇지. 아이고 잘한다. 역시 내 제자들." 

이렇게 고요히 설명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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